로마 제국 멸망까지
열린다 교회사

7. 초대 교회의 이단들

2세기에 기독교 교회는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했는데, 외적으로는 국가와 충돌하며 박해를 견뎌야 했고 내적으로는 신자들의 신앙을 뿌리부터 오염시키는 각종 이단들에 맞서 정통 교리를 확립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이 시기에 교회를 어렵게 만든 이단은 크게 네 가지가 있었다.

가현설

주후 1세기 말에 이미 '물질은 그 자체가 악하다'는 생각이 기독교 사상에도 들어와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런 사상은 특별히 소아시아 지방에서 성행했다.

요한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진실로 사람이 되신 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일부 학파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고 특별히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단지 인간의 육체적 형태를 입었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요한이 이러한 강조법을 사용해야 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성육신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외형적으로 그렇게 보인 것에 불과했다'고 가르친 가현설 교리가 성행했기 때문이다.

가현설(Docetism)이라는 명칭은 '…처럼 보인다'를 뜻하는 그리스어인 '도케인'(dokein)에서 유래된 것이다.

요한과 동시대를 살았던 세린투스가 이끈 일부 극단적인 가현설 학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라는 인간이 세례를 받을 때 잠시 그 위에 임하였다가 그가 십자가상에서 죽을 때 그에게서 떠났다고까지 주장했다.

또 다른 학파에서는 예수님의 인성이 완전히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힌 인물은 예수가 아니라 구레네 시몬이라고 주장하는 학파도 있었다. 물론 이런 사상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을 파괴시킬 수 있는 중대한 이단이었다.

영지주의

영지주의(Gnosticism)는 '지식'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그노시스'(Gnosis)에서 파생된 것으로 초대 기독교의 발전에서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친 이단 사상이다.

영지주의는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기존의 소박한 우주관에서 훨씬 진일보한 새로운 우주관을 유행시키면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흔히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로 불리는 이 학설은 16세기에 들어서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할 때까지 실로 오랜 세월을 풍미했던 사상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지구는 또 다른 여러 개의 구(球)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이 구 안에는 각각 별도의 혹성계가 있고 이 혹성계는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

이 새로운 우주관에서 발전한 영지주의는 가현설과 기본적인 전제에 있어서 동일했다. 하지만 가현설과 구별되는 영지주의만의 특징은 그노시스를 강조하고 기독교를 자신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지식에 도달하는 길로서 이해한 데 있다.

영지주의가 교회에 끼친 영향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긍정적인 면은 영지주의가 교회의 지적 활동을 자극해 정통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을 논리적으로 변증하도록 촉진했다는 점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잘못된 그노시스와 대비시켜 기독교를 '진정한 그노시스'라고 소개했다. 클레멘트의 가르침은 알렉산드리아에 교회 최초의 신학대학이라 할 수 있는 '교리 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클레멘트의 교훈은 아직 체계화되지 못했지만, 그다음 세대의 학교 교장이었던 오리겐은 기독교 최초의 조직신학이라 할 수 있는 <제일 원리들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출간하기도 했다.

영지주의가 끼친 부정적인 영향은 기독교 신앙이 지나치게 지식화되었다는 점이다. 신앙은 이로 인해 그리스도를 향한 개인적 결단보다는 지적 정통성을 의미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고 이후 광신적인 이단 논쟁으로 발전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말시온주의

2세기에 출현한 기독교 사상가 중 말시온은 가현설과 영지주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이들과 판이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라서 별도로 말시온주의라고 불린다.

소아시아 출신인 말시온은 140년경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로마 교회를 방문해 자신의 독특한 교리를 소개했다. 하지만 로마의 감독과 교인들은 그의 교리를 정면으로 거부했고, 말시온 역시 이들과의 교제를 끊고 분파적인 교회를 만들었다.

말시온이 제시한 특징적인 교리 중 몇 가지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물질세계의 부패를 강조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나친 금욕주의를 실행한 것이다. 말시온은 자신은 물론 추종자들에게도 결혼생활을 거부하도록 가르쳤다.

둘째,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서로 다른 존재라는 개념을 최초로 이론화시켰다. 그에 따르면, 신약의 하나님인 '성부'(예수님의 아버지)와 구약의 하나님인 '여호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성부는 오직 선한 영적 세계를 창조한 선한 신이고, 여호와는 악하고 더러운 물질세계를 창조한 악한 신이라는 것이다.

말시온이 교회에 끼친 영향은 그가 최초로 정경화 작업을 추진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말시온은 구약성경을 인정하지 않았고 누가복음과 바울의 10개 서신을 중심으로 '말시온 성경'으로 불리는 자체적인 성경을 편집했다. 이것은 정통파 기독교에서 신약성경의 정경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자극이 되었다.

몬타누스주의

2세기 당시 교회의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는 각각 좌우로 치우친 이단이었다. 영지주의가 지나치게 이지적인(intellectual) 측면을 강조했다면,

몬타누스주의는 지나치게 영감적인(spiritual) 측면을 강조했다. 몬타누스주의의 창시자인 몬타누스는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지방 출신으로 156년경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 지역은 대모신(大母神)을 섬기는 밀교가 유행하던 곳인데, 대모신을 섬기는 사제들은 황홀 상태에 빠져 고통을 이기고 춤을 추고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몬타누스는 예수를 믿기 전 대모신을 섬기는 사제였고 자신이 믿게 된 기독교를 이전의 방법으로 표현하는데 전혀 부담이 없었다. 몬타누스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성부의 시대가 끝나고 성자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성자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성자의 시대도 막을 내리고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포했다.

몬타누스주의는 처음에 교회 안에서 시작했지만 배척받고 쫓겨난 후에는 새로운 종파를 이루게 되었다. 정통교회에서 벗어난 후 이들의 주장은 더욱 과격해졌다.

이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추구했고 예언의 계속성을 주장하면서 참된 신자라고 하면 반드시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다. 성령을 받기 위해 철저한 금욕주의를 실천한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점차 결혼 자체를 부인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핍박의 때에는 적극적으로 순교의 자리로 나서는 열망을 보이기도 했다.

'한 번 회개하고 범죄 한 영혼은 더 이상 회개할 길이 없다'는 말씀(히 6:4-6)에 기초한 몬타누스주의의 엄격한 가르침은 점차 영적 자만심과 거짓 경건의 경향으로 흘러 오히려 율법주의의 덫에 빠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꼴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