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멸망까지
열린다 교회사

6. 명상록을 남긴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년) : 명상록을 남긴 철인 황제

오현제 시대의 피날레를 장식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만큼 동시대 로마인은 물론 2천 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줄기차게 높은 평가를 받아온 황제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남긴 '명상록'이라 불리는 한 권의 책이 끼친 놀라운 여파 때문이다.

황제로서 야만족을 격파하는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전쟁터에서 틈틈이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명상록>은 황제이지만 스토아 철학자로도 명성을 날린 그의 철학적 사색과 성찰이 잘 드러나 있다.

현대 서양의 지식인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향해 '고대인의 윤리를 드러낸 최상의 발로' 내지는 '고귀한 영혼의 진지한 외침'과 같은 최고의 찬사를 바치고 있다. 철학자가 통치하는 철인 국가를 이상적인 국가 모델로 제시했던 플라톤에게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분명 이상적인 군주의 전형으로 보였을 것이다.

지금도 로마의 일곱 개 언덕 가운데 하나인 카피톨리노 언덕에는 우뚝 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이 로마를 찾는 관광객들 앞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다.

주후 4세기에 로마가 기독교화 된 이후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에게 철저히 복수한다는 명목으로 그리스, 로마 문화와 관련된 미술품들을 마구잡이로 파괴할 때도 이 기마상만큼은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것은 미술품 파괴를 일삼은 기독교 광신도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의 <명상록>을 읽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도 아니고, 이 청동 기마상의 예술적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이 청동 기마상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우습게도 이 청동 기마상의 주인공을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로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풍성한 턱수염을 기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왜 늘 수염을 깨끗이 깎았던 콘스탄티누스와 혼동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 오해가 당시 22점이나 되던 로마 황제들의 기마상 가운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만이 유일하게 살아남게 된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고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아버지는 제국 순행을 위해 수도 로마를 자주 비운 하드리아누스의 통치기에 3번이나 집정관을 지내며 국정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소년 시절을 보낸 하드리아누스의 통치기는 로마제국 곳곳에 세계주의적 분위기가 진하게 드리워진 시기였다. 이때는 이탈리아 반도뿐 아니라 로마가 정복한 지중해 세계의 드넓은 속주민들 모두 자신을 로마인으로 생각했고, 능력만 있으면 속주민들도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그런 시대였다.

흔히 인류 역사에서는 로마제국과 가장 유사한 제국을 실현한 예로써 대영제국을 든다. 하지만 당시 영국의 통치를 받던 인도 사람, 이집트 사람 등 피지배층 가운데 자신을 영국인으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똑같은 '제국'으로 불리지만 로마제국과 대영제국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를 풍미하던 세계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인격의 형성기인 소년 시절을 보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세계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스토아 철학에 매료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는지 모른다.

선대 황제인 안토니누스의 아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버지는 친남매 사이였기 때문에 능력과 혈연 면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선대 황제의 태평성대를 이을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였다.

하지만 '질서 있는 평온'이 지배했던 안토니누스 시대와는 달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는 온갖 산적한 문제들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폭발한 시기였다. 그의 재위 시작과 동시에 기근이 덮쳤고 기근을 한탄하기가 무섭게 홍수가 나며 로마 시를 가로지르는 테베레 강이 범람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방의 숙적인 파르티아제국이 로마를 침공해왔다. 161년에 시작된 파르티아 전쟁은 166년에 가서야 가까스로 끝날 정도로 선대 황제(안토니누스)의 오랜 통치기에 누린 태평성대로 인해 로마는 한없이 허약해져 있었다. 이를 볼 때 안토니누스는 '비 오는 날을 대비해 맑은 날 우산을 미리 준비해두는' 그런 타입의 통치자는 아니었던 듯싶다.

그럼에도 파르티아 전쟁은 로마를 함부로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를 동방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전쟁이 되었다.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예전의 막강한 위용을 되찾은 로마 군은 파르티아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때의 복수극이 파르티아제국을 약화시켜 결국 60년 후 파르티아제국이 멸망하게 되었고, 이것이 사산조 페르시아로 불리는 신흥 제국이 대두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파르티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황제는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무려 49년 만에 열리는 개선식에 황제는 개선장군이 타는 황금 전차에 처자식을 함께 동승시켰다. 반세기의 태평성대를 지난 후에는 개선식도 편안하고 가정적인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 '황제 혼자'에서 '가족 동반'으로.

하지만 개선식의 환희가 수도 로마를 덮고 있을 때 새로운 재앙이 찾아왔다. 야만족을 막아내는 로마제국의 중요한 방어선인 라인강과 도나우강의 군단 기지를 중심으로 흑사병이 강타한 것이다. 서양 역사상 유명한 첫 번째 흑사병은 주전 430년경 그리스 아테네를 덮친 흑사병이었다.

이 역병은 때마침 발발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내전, 주전 430-404년)과 맞물리며 아테네에 회복 불능의 타격을 주었다. 아테네의 황금기를 이끈 정치가 페리클레스도 이때 발생한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두 번째 흑사병이 바로 파르티아와 전쟁 직후인 주후 166년부터 167년까지 최전방에 있는 로마 군단을 덮친 흑사병이다.

역병으로 인해 사망자들이 속출하고 방어선이 취약해지면서 북방에서 야만족들의 위협이 거세지자 동시대 로마인들의 마음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반세기 만에 거행된 개선식의 흥분과 환희가 로마 전역을 덮을 때가 과연 언제였나 싶을 정도였다. 황제는 제국에 드리운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신들에게 기원하는 거국적인 제의를 올리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때 기독교인들의 존재가 다시금 부각된다. 평소에도 이교적인 제의에 참여하지 않던 기독교인들은 연거푸 덮친 국가적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해진 국가적인 제의에 불참함으로써 그 부정적인 존재감이 다시금 부각된 것이다. 당시 14개 구역으로 나뉜 로마 시에서 기독교인들은 12, 13, 14구역에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일반 로마인들과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살았던 것이다.

위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평소보다 더욱 강한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희생양을 찾는 일에 분주하게 만든다. 로마인들은 평소에도 기독교인들의 반사회적인 행동에 혐오감을 보이던 차에 로마를 덮친 일련의 재앙들의 원인으로 기독교인들을 지목했다.

기독교인들로 인해 화가 난 로마의 전통 신들이 더 이상 로마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당시에 있었던 기독교 박해는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것인데,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려고 한다.

170년, 거국적인 제의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는지 로마의 철통같은 도나우 강 방어선을 뚫고 야만족들이 물밀 듯 밀려왔다. 팍스 로마나의 태평성대를 구가한 지 무려 270년 만에 철통같은 방어선이 뚫린 것이다.

야만족의 일부는 그리스 중부까지 침입해 신전을 마음껏 약탈하고 돌아갔다. 172년에 1차 게르만 전쟁, 178년에 2차 게르만 전쟁이 일어나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후반기는 전반기보다 더 혹독하면 혹독했지 덜하지 않았다.

1차 게르만 전쟁이 치러지던 중 막간극으로 일어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로마의 기병 대장인 막시미아누스가 야만족 족장과 일대일로 겨루는 수장 대결에서 승리해 전투를 로마 쪽으로 유리하게 전개한 것인데,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글래디에이터>가 나오면서 후세에 그의 이름을 각인시킬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막시미아누스'란 이름이 어렵고 길기 때문인지 '막시무스'로 바뀌었다.

2차 게르만 전쟁이 한창이던 180년, 황제는 전투 개시를 앞두고 쓰러졌다. 기질적으로 전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치세 19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으로만 점철된 시간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로써 전선에서 죽음을 맞이한 최초의 로마 황제로 기록되었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박해 : 교회와 국가의 충돌 제3라운드

교회와 국가의 충돌을 다룰 때 네로, 도미티아누스에 이어서 세 번째로 등장하는 황제가 트라야누스다. 앞선 두 황제가 모두 폭군으로 악명을 떨친 데 반해 트라야누스는 속주 출신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최초의 인물로서 선정을 베푼 황제로 기록된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를 핍박한 로마제국의 10대 황제 명단에 이름을 올린 트라야누스는 그 배경에 있어서 앞선 두 황제와 확실한 차별화를 이룬다.

트라야누스의 기독교 박해를 다룰 때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112년에 트라야누스가 비두니아(소아시아 북서부) 총독으로 파견한 플리니다.

그는 역사에서 흔히 소 플리니(Pliny the Younger)라고 불리는데, 주후 79년에 발생한 베수비오 화산 대폭발 때 생명을 잃은 그의 삼촌 역시 같은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 플리니(Pliny the Elder)는 37권으로 된 《박물지》(Natural History)를 저술한 박물학자로서 그가 폼페이 시를 통째로 삼켜버린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희생자가 된 것도 화산활동을 너무 유심히 관찰하다가 미처 대피할 시간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로마 법률과 전통을 숭상하는 인물이었던 플리니 총독은 파견지에 도착하자마자 예기치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당시 비두니아 지역은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아 그곳의 이교도 신전들은 거의 흉가처럼 버려져 있었는데, 새 총독의 부임과 함께 이교도들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명단을 적어 무더기로 고발했다.

당시 기독교는 로마법상 불법 종교였기 때문에 플리니는 로마 시민권이 없는 일부 기독교인들을 처형한 후 로마 시민권자들은 재판을 위해 로마로 송환하려고 대기시켰다.

이전에도 기독교인들이 처형당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별 주저함 없이 몇 사람을 처형한 플리니 총독은 비두니아 지역에 엄청나게 확산된 기독교인들을 모조리 처형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고뇌를 거듭하다가 황제(트라야누스)에게 서신을 띄워 이 문제를 의논하게 된다. 플리니 총독의 소소한 질문에 대한 황제의 답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대한 일반적인 규칙은 아직 로마법상 정립되지 않았다.

둘째, 기독교인들의 죄는 그 성격상 국가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가며 색출해야 할 만큼 흉악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에 대한 고발이 접수된 경우에만 개전의 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자에 한해서 처벌해야 한다.

셋째, 이때도 익명으로 고발된 경우는 고발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익명의 고발은 로마법이 추구하는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플리니 총독에게 보낸 트라야누스의 답변은 이후 2세기와 3세기에 걸쳐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되었는데, 약 100년 후 카르타고 감독이 된 터툴리안은 트라야누스 칙령의 모순을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로마의 정책은 얼마나 일관성이 없는가? 로마법은 기독교인들이 무죄한 줄 알기 때문에 일부러 색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이 유죄라고 규정하면서 처벌하려고 한다.'

터툴리안의 지적처럼 트라야누스의 칙령에 논리성이 결여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2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생사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웃이 자신들을 당국에 고발하면 이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로마 황제를 위한 향불을 피우는 의식을 법정에서 행해야 했고 이를 거부할 경우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박해로 인해 안디옥 감독인 이그나티우스가 순교하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 : 교회와 국가의 충돌 제3라운드

161년 황제의 자리에 오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제국 황제 중 가장 계몽된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네로나 도미티아누스처럼 권력과 허영에 사로잡힌 인물이 아니었고, 그들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수양을 위해 <명상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황제의 치하에서 기독교인들이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 앞에 못내 씁쓸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역사적 팩트다. 스토아 철학자로도 명성을 날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보인 반기독교 성향으로 인해 동시대 기독교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그가 남긴 <명상록>이 후대 기독교 시대에 경건 서적의 표준서처럼 읽히게 된 것은 분명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의 사후에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그토록 존경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명상록>의 내용도 상당 부분 달라졌을 것이다. 스승 프론토의 영향을 깊이 받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를 조잡한 미신으로 여겼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기독교인들의 순교에 대해서도 변태적인 오만으로 경멸하고 있다.

이런 그에게 홍수와 기근, 전염병의 창궐, 야만족의 침입 등으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을 전환할 목적으로 시행한 거국적인 제의에 기독교인들이 불참한 사건은 결코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교도들은 제국 안팎에 닥친 국가적 재앙의 원인을 기독교인들 탓으로 돌렸는데, 이들에 따르면 기독교인들로 인해 로마의 전통 신들이 분노해서 더 이상 로마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계몽된 군주의 대명사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녀 사냥과도 같은 이런 류의 비난에 동조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국가적인 제의에 불참한 기독교인들의 반국가적 행동은 철저하게 응징을 받았다.

그의 통치기에 있었던 기독교 박해를 통해 기독교 철학자요 변증가로 이름을 날리던 저스틴이 순교하게 된다. 철학자 황제의 치하에서 당대 최고의 기독교 철학자가 순교하게 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과부 펠리시타스와 그의 일곱 아들들의 순교도 유명하다. 교회 사역을 위해 구별된 과부였던 펠리시타스는 당국에 고발되어 각종 회유와 협박을 받았지만 신앙에 대한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당신에게 승리할 것이며 나를 죽인다면 죽음을 통해 더욱더 큰 승리를 거두리라.'

이들에 대한 심문 기록을 보고받은 황제는 기독교인들의 아집을 경멸하면서 펠리시타스와 그녀의 일곱 아들들을 도시의 서로 다른 구역에서 처형하도록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