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외적으로는 박해가, 내적으로는 이단의 가르침이 교회를 안팎에서 협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대한 위기는 교회 내에서 이러한 위기를 타개해나갈 확고부동한 권위가 부재한 데 있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으로 인해 교회가 탄생한 1세기와 달리 2세기로 접어든 교회가 당면한 문제의 핵심이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사도들은 교회의 든든한 지도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3년간 예수님을 따랐고 그분의 고난, 죽음, 부활, 승천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었다. 사도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예수님의 지상에서 삶의 연속이었고 아무도 그들의 권위에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1세기가 끝나갈 무렵 사도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사도들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속사도)도 모두 늙고 대부분 죽었다. 그렇다면 누가, 그리고 어떠한 권위를 앞세워 안팎으로 산적한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권위의 부재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목회자의 권위, 둘째는 신약성경의 정경화 작업, 셋째는 사도신경의 정립이었다.
- 목회자의 권위
1세기 당시에는 장로와 감독이 모두 성직자를 의미했다면 2세기로 접어들면서 눈에 띄게 나타난 변화는 감독(목회자)에게 권위가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 점에서 로마 감독 클레멘트는 중요한 말을 남긴 바 있다. 그는 “목회자가 사도들의 직책을 계승한다”고 주장했다. 즉 목회자들은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준 바로 그 권위로 지명되었고 그 권위로 교회를 이끌어간다는 것인데, 이러한 주장은 흔히 ‘사도성의 계승’이란 말로 표현된다.
이후 목회직의 사도성 계승이란 개념은 교회 내에서 목회자의 지도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와 리옹 감독 이레니우스가 이러한 논리로 목회자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 신약성경의 정경화
이단자 말시온이 구약성경 전체를 부인하고 바울 서신을 중심으로 한 자체적인 성경 목록을 발표한 것은 교회에 커다란 각성을 주었고, 이것은 곧바로 신약성경의 정경화 작업으로 이어졌다.
우리에게 최초로 알려진 신약성경 목록은 ‘무라토리안 단편’인데, 이것은 1740년 이탈리아 사람 안토니오 무라토리가 발견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라토리안 단편은 170-180년경 로마 교회에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200년경이 되면 현재 우리가 가진 것과 거의 같은 신약성경 목록이 인정되었는데, 여기서 정경으로 인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도성’에 있었다. 사도가 썼든지, 혹은 사도와 아주 가까운 인물에 의해 쓰인 책만이 정경 목록에 포함된 것이다.
사도는 아니었지만 베드로와 함께 사역한 마가의 복음서와 바울과 함께 사역한 누가의 복음서가 신약성경에 추가된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성경의 목록은 367년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만들어졌고,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의결된 것이다.
- 사도신경
사도신경은 교인들이 공동으로 고백할 신앙의 내용으로서, 그리고 정통 신앙과 이단을 구별할 시금석으로서 만들어졌다. 200년경 로마 교회에서는 세례 신청자에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이 세례 문답으로 주어졌다.
1. 그대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가?
2. 그대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으며 이 때문에 죽으시고 제3일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승천하시고 성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3. 그대는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육신의 부활을 믿는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질문들은 신앙고백으로 다듬어졌고, 5세기경에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사도신경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성자에 대한 강조에 있다. 이단에서 단골 메뉴로 사용하는, 즉 그리스도가 단지 인간처럼 보였다는 가현설을 반박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동시에 인간이었다는 점이 강조되었고,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그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보다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는 1세기 말부터 기독교를 공인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등장하는 4세기 초까지 어려움에 처한 교회를 이끌어가야 했던 지도자들을 흔히 ‘교부’(敎父)라고 부른다. 우리가 다루는 2세기 초, 중반에 활동한 교부들은 속사도와 변증가로 불리는 유형의 지도자들이었다.
A. 속사도
속사도는 사도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로서 사도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속사도’로 불린 것이다. 속사도에 속하는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죽은 후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교회에 불어닥친 박해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교회를 이끌어나갔다.
이들 중 대다수는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 속사도들은 신앙을 위한 심오하고 사변적인 글을 남기지 않았고 후대에 조직신학으로 불리는 거대한 신학체계를 발전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때그때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신앙을 설명했을 뿐이다. 이들은 한마디로 사도들이 갖고 있던 신앙의 생명력을 후대에 전달해주는 브리지 역할을 했다.
밖으로는 핍박과 안으로는 각종 이단 사상이 판을 치는 가운데서도 속사도들은 양떼를 이끌고 순교의 무서운 멍에도 마다하지 않은 참된 목자들이었다.
ⓐ 로마의 클레멘트
베드로와 바울의 제자인 클레멘트는 후대에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같은 이름을 가진 클레멘트와 구별하기 위해 흔히 ‘로마의 클레멘트’로 불린다.
그는 빌립보서 4잘 3절에 나오는 인물과 동일인이 아닌가 추정된다. 주후 92년부터 101년까지 로마 교회의 감독을 지낸 클레멘트는 로마의 귀족으로서 당대의 학문과 철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진리를 찾아 여행을 하던 중 이스라엘에서 베드로를 만나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이후 베드로의 선교 여행에 동행하며 베드로의 책 저술을 돕기도 했다. 로마 교회 감독이 된 클레멘트는 바다에서 파도에 잠기는 형태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 이그나티우스
안디옥교회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베드로, 바울, 요한 모두의 제자였다. 그를 목사로 안수한 사람은 바울이었다. 107년경 그는 사슬에 묶여 로마로 압송되어 경기장에서 사자들에게 던져졌다. 압송 도중 자신이 지나가는 소아시아의 교회에 보낸 7개의 편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로마에 도착한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을 구출하려는 로마 교인들을 자제시키며 오히려 자신이 용기 있게 이 시련을 잘 견딜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만약 그대들이 나를 위해 침묵을 지킨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이 육신에 연연한 사랑에 의해 흔들린다면 나는 단지 인간의 목소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 폴리캅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폴리캅은 서머나교회의 감독으로 있다가 155년경 순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재판관은 노령에 접어든 폴리캅의 나이를 고려해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석방해주겠다고 회유했다. 하지만 폴리캅은 후대에도 알려진 유명한 답변으로 이를 일축했다.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나를 한 번도 저버리신 일이 없다.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내가 저주할 수 있겠는가?”
재판관이 산 채로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폴리캅은 오히려 “재판관이 붙인 불은 순간이지만 지옥의 영원한 불길은 꺼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기둥에 묶여 화형 당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폴리캅은 순교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우신 주님께 찬송을 드리며 숨을 거두었다.
B. 변증가
속사도들은 박해에 대항해서 기독교를 변호하기보다는 감사함으로 순교의 잔을 마셨다. 하지만 2세기 중엽으로 넘어가면서 이교도 지식층을 중심으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자 기독교 진영에서도 전략을 바꿔 이에 대해 적극적인 변호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할은 소위 ‘기독교 변증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맡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로 전향하기 전 헬라 철학에 깊이 심취해 있던 사람들이었다.
외부 세계를 향해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나선 기독교 변증가들은 매개체로 자신들의 전공 분야인 헬라 철학을 사용했다. 이들은 철학적인 용어와 논리를 이용해 기독교를 설명했지만 어쩔 수 없이 헬라 철학의 구조상 복음을 그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약화시키거나 심하면 왜곡시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기독교 변증가들의 활약으로 기독교는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었지만, 기독교의 생명력은 소실되고 인간의 논리 안에 갇히게 되는 어쩔 수 없는 폐단도 뒤따랐다.
ⓐ 콰드라투스
아덴의 감독이었던 콰드라투스는 사도들의 직속 제자였고 활동 시기도 125년경인 점에서 볼 때 속사도로 분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훌륭한 기독교 변증서를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보냈기 때문에 기독교 변증가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디오그네투스에게>란 제목의 변증문은 콰드라투스의 작품으로 여겨지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변증문으로서 세상을 향해 기독교인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가장 감동적이고 웅변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기독교 신자들은 국적과 언어와 관습에 있어서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고국에 살고 있지만 나그네들이다. 그들은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다하고 있지만 외국인처럼 박해를 받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 가든지 그곳을 고국으로 삼지만 동시에 그들의 모국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육신을 입고 있지만 육신에 따라 살지 않는다. 그들은 지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의 시민들이다. 그들은 모든 법률을 지키지만 법률이 요구하는 것보다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모든 인간들을 사랑하지만 모든 인간들에 의해 박해받고 있다.”
ⓑ 저스틴
기독교의 변증가로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저스틴을 들 것이다.
사마리아 지방의 세겜 태생인 저스틴은 진리에 목마른 철학도로서 살았다. 하지만 에베소를 여행하던 중 자신의 모든 지혜를 부끄럽게 만든 경건한 기독교도 노인을 만난 후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 그는 교회를 찾아다니며 복음의 교리를 배웠고 성직자로 안수 받지는 않았지만 틈만 나면 설교를 했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평신도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다.
저스틴은 153년경 로마를 방문해 황제 안토니누스에게 <변증서>를 써서 보냈는데, 여기서 그는 정부의 적대 감정과 이교도들의 비판으로부터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다시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 유대교 랍비인 트리포와 대화한 내용을 <트리포와의 대화>란 제목의 저술로 남기기도 했다.
저스틴의 기독교 변증에서 핵심 사상은 기독교가 ‘모든 철학 중 가장 참된 철학’이라는 것이다. ‘로고스’의 교리로 태초에 계셨던 ‘말씀’을 설명한 저스틴은 그리스의 철학자들 중 일부는 기독교 진리의 편린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166년경 로마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저스틴은 다른 6명의 신자들과 함께 목 베임을 당했다. 순교의 순간에 그가 남긴 유명한 말로 인해 그의 이름 앞에는 ‘순교자’가 붙어 후대에 ‘순교자 저스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반드시 당할 무서운 심판대 앞에서 우리에게 구원과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