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멸망까지
열린다 교회사

5. Part 2 오현제 시대(주후 96-180년)

도미티아누스가 죽고 이후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황제를 가리켜 후세의 역사가들은 '오현제'(五賢帝)라고 부른다. 로마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은 오현제가 다스린 시대를 '인류가 가장 행복했던 시대'라고 극찬한 바 있다. 이번 장에서는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 주후 96년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한 주후 180년까지의 오현제 시대를 다루고자 한다.

네르바(주후 96-98년) : 맞춤형 구원투수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의 침실에 침투해 자신의 목숨을 노린 암살자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황제를 구하러 달려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황궁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하인과 호위병들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폭군 네로의 계보를 확실하게 이은 도미티아누스가 죽고, 네르바가 일사천리로 차기 황제에 추대되었다. 원로원 의원으로서 집정관 경험이 있고 70세의 나이에 자식까지 없었던 네르바야말로 황제의 갑작스런 암살로 맞게 된 과도기의 로마를 이끌 수 있는 맞춤형 구원투수였기 때문이다.

고작 1년 4개월의 짧은 통치를 마치고 자연사한 네르바를 오현제의 황금시대를 연 첫 번째 인물로 평가하는 데 있어서 많은 역사가들은 의구심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비록 짧은 통치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룬 무시 못할 업적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주후 68년 네로 황제의 암살 이후 이듬해인 주후 69년 한 해 동안 4명의 황제가 난립한 전대미문의 혼란을 기억한다면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갑작스런 암살로 초래된 국정의 공백을 자연스럽게 매운 네르바의 통치는 비록 그의 짧은 통치 기간에도 불구하고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둘째, 능력 있는 트라야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고 양자로 삼은 것이다. 늙은 나이에 자식도 없었던 네르바로서는 궁여지책이었겠지만, 능력 있는 후계자를 찾아 양자로 삼은 후 제위를 물려주는 네르바의 독특한 후계자 지명 방식은 이후 오현제 시대 동안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고, 이로 인해 로마는 연속적으로 현명한 황제의 통치 아래 국운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혈통 지상주의만 고집하다가는 또다시 네로나 도미티아누스와 같은 폭군이 등장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에 네르바의 새로운 후계자 지명 방식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다.

이외에도 네르바는 짧은 통치기 동안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를 종식시켰고, 이런 조치의 일환으로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도 풀려날 수 있었다.

트라야누스(주후 98-117년) :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양자로 삼았을 때 원로원과 군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트라야누스는 비록 능력이 출중할지라도 이탈리아 본토 출신이 아니라 스페인 속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원로원 의원들은 그의 후계자 지명에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최고의 용맹을 자랑하는 고지(高地) 게르만 지역의 로마군 총사령관으로서 이미 능력을 검증받은 트라야누스는 군부의 견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딴지 걸기를 좋아하는 역사가들도 네르바가 오현제에 포함된 이유를 굳이 들라고 하면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능력만 보고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을 든다. 이로써 이탈리아 반도 태생이 아닌 최초의 속주 출신의 황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44세의 한창 나이에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는 전임자인 네르바가 죽은 후에도 곧바로 수도 로마로 입성하지 않고 게르만족과 대치하는 최전방인 쾰른에 머물렀다. 국경을 튼튼히 한 트라야누스는 황제가 된 지 1년 반이 지난 주후 99년 여름이 되어서야 수도 로마로 입성했다. 스페인 속주 출신으로 오랜 세월 동안 전쟁터만을 누비던 트라야누스도 수도 로마를 중심으로 한 정계(政界)에서는 완전한 미지의 인물이었다. 그런 신참 황제를 원로원 의원들은 기대 반, 한편으로는 의심 반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마를 둘러싼 성벽에 다다르자 신참 황제는 말을 탄 채 수도로 입성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황제를 마중 나온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걸어서 들어갔다. 이것이 신참 황제를 향한 원로원 의원들의 불안과 의구심을 떨구는 데 크게 일조했다. 게다가 트라야누스는 사생활에서도 지출을 최소화했는데, 황실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청받은 원로원 의원들도 그 소박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트라야누스는 여러 차례 외부 원정을 감행하며 로마 제국의 영토를 사상 최대의 크기로 넓힐 수 있었다. 106년에 있었던 원정으로 다키아 지방(오늘날 루마니아)과 아라비아 지방은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113년에는 로마 제국 최고의 적수인 파르티아 제국의 원정을 감행했다. 파르티아 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까지 함락한 트라야누스의 원정은 대단한 성공이었고,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고대 도시 바벨론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내가 조금만 더 젊었다면 인도까지 진격했을 텐데….'

로마의 숙적인 파르티아 제국의 수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웬만해서는 들뜨지 않던 원로원 의원들도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며 황제를 위한 화려한 개선식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로마로 돌아가는 길은 모든 면에서 상황이 돌변했다. 새롭게 제패한 동방 지역에서 반란이 연거푸 일어났고, 파르티아 제국도 진영을 재정비해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며 퇴각하는 로마 군을 쉴 새 없이 괴롭혔다.

파르티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트라야누스는 급기야 거듭된 원정으로 인한 피로가 겹쳐 질병에 걸렸고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결국 117년, 64세 생일을 한 달 앞둔 트라야누스는 20년의 치세를 마치고 눈을 감았다. 수도 로마에 돌아온 것은 황제의 유골이었고,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장례식이 아니라 화려한 개선식으로 이를 맞이했다.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 위에 안치된 것은 유골을 담은 항아리였다. 물론 죽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이때의 개선식은 로마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있는 일이었다.

후세의 역사가들이 트라야누스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간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트라야누스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한 이유는 속주 출신으로서 최초의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오.'

하드리아누스(117-138년) : 쉴 새 없이 속주를 순방한 황제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에게 외사촌 동생이었으니까 후손을 보지 못한 그로서는 하드리아누스가 제위를 잇기에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다. 스페인 출신의 하드리아누스는 아버지를 10살 때 여의었고 죽기 직전에 아버지가 아들의 후견인으로 부탁한 사람이 트라야누스였다. 당시 33세였던 트라야누스도 군단에 근무하는 대대장에 불과했고, 당시만 해도 자신이 12년 뒤 황제가 되리라고는 전혀 꿈도 꾸지 않던 시절이었다.

하드리아누스가 트라야누스와 가까운 친척이었다고 해서 단지 혈통만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공명정대했던 트라야누스는 후계자로 하드리아누스를 염두에 두고 정계와 군무에서 다양한 경험을 시켰고 그야말로 실력을 통해 당당히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트라야누스는 로마의 숙적인 파르티아 원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병으로 쓰러졌고, 파르티아 전쟁의 마무리는 시리아 속주의 총독으로서 이미 2인자의 자리를 굳히고 있던 하드리아누스에게 맡겨졌다. 트라야누스는 숨을 거두기 직전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맞아 후계자로 지명했다.

황제가 된 하드리아누스는 파르티아 전쟁을 지속하기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쪽을 택했다. 수도 크테시폰을 버리고 도망쳤던 파르티아 왕은 이 틈을 이용해 귀국했고 이로써 상황은 파르티아 원정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왕성한 원정으로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트라야누스와는 달리 하드리아누스의 국방 철학은 영토를 확대하기는커녕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드리아누스 통치의 특징은 21년의 치세 기간 동안 본국 이탈리아에 머문 것은 고작 7년에 불과하고 계속 제국 전역을 순행하며 속주민들의 소리를 들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38년, 62번째 생일을 맞은 하드리아누스는 자신보다 10살 아래인 안토니누스를 초대해 그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로 지명했다. 공격보다는 수비에만 치중했던 탓에 하드리아누스는 한 번도 개선식을 거행하지 않은 황제였다. 하지만 그의 쉴 새 없는 속주 순방과 북방 방어선 점검을 통해 로마의 국경은 그야말로 철벽화되었다. 북방 야만족들에게 섣불리 로마에 덤볐다가는 호된 반격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각인시킨 하드리아누스의 방위 체제는 현대적 개념에서 볼 때 강력한 전쟁 억지력을 실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년) : 태평성대를 이끈 황제

23년의 짧지 않은 치세에도 불구하고 안토니누스의 통치기는 전기 작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다지 쓸 만한 것이 없는 심심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원로원이 안토니누스 황제에게 '피우스'(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를 별명으로 붙여줄 만큼 그의 통치기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평안하고 행복한 시기였다. 52세에 황제가 될 때까지 군대를 지휘해본 경험이 전무했다는 것은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치명적인 결격사유였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통치기는 영웅을 기다리는 난세가 아니라 태평성대의 연속이었다. 49세 때 1년간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내며 베푼 그의 선정은 수도 로마에서도 평판이 자자했다고 한다.

황제가 된 후 안토니누스가 원로원 단상에서 가장 먼저 선포한 내용은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 계속 머물며 속주로의 순행을 자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치세의 대부분을 속주 순행으로 보내며 속주민들의 불만을 경청했던 하드리아누스였지만, 이것이 오히려 수도 로마의 시민들에서는 커다란 불만거리였던 것이다. 속주 순행을 자제했던 탓인지 안토니누스는 62세에 죽은 하드리아누스보다 오래 장수해 75세까지 황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안토니누스는 국장을 너무 화려하게 치르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선대의 두 황제가 '통치자'로서의 이미지를 남기고 죽었다면, 안토니누스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세계에서는 흔치 않은 장수를 누리고 숨을 거두었지만, 안토니누스의 죽음에 로마 시민과 속주민들은 한결같이 황제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