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 황제 치하에서 일어난 최초의 기독교 박해가 로마 시에 발생한 대화재라는 우발적인 사고로 인해 엉뚱하게 불똥이 튄 케이스였다면,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일어난 두 번째 박해는 앞으로 '황제 숭배'를 이슈로 교회와 국가가 맞붙게 될 충돌의 서막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네로 황제의 핍박을 기점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이 있기까지 기독교를 박해했던 10명의 황제 이름을 간략히 열거해보자.
네로(주후 54-68년)
도미티아누스(주후 81-96년)
트라야누스(주후 98-117년)
하드리아누스(117-138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년)
막시미누스(235-238년)
데키우스(249-251년)
발레리아누스(253-260년)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년)
이들 10명의 황제들이 주도한 기독교 박해는 초대 교회사를 다루는 책에서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해당 황제를 다룰 때마다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황제 숭배'를 이슈로 교회와 국가가 충돌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듯싶다.
'먼저 숲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후에 개개의 나무를 살펴보라'는 말처럼 10번에 걸친 개개의 기독교 박해를 살펴보기 전에 교회와 국가를 정면충돌로 몰고 간 핵심 키워드인 '황제 숭배'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황제 숭배와 기독교 박해를 다루기에 앞서 도발적인 두 개의 질문을 던지고 시작해보려고 한다.
첫째, 로마 제국에서 종교 정책의 코드는 한마디로 '관용'이었다. 이것은 속주민들의 전통 종교를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왜 로마 황제는 기독교만 콕 찍어 핍박한 것일까? 로마제국의 수많은 종교 중 기독교만 미운 털이 박히고 미운 오리새끼가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둘째, 도미티아누스와 같은 예외도 있지만 이상에 언급한 황제들은 대부분 박해의 화살을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에만 집중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항해 수차례 반란을 일으킨 전적이 있지만,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대항해 대규모 반란을 꾸몄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왜 로마의 황제들은 유대교에는 관용을 보이면서 유독 기독교에만 잔인한 핍박으로 일관한 것일까? 때로는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의 씨를 말리려고 작정한 듯 그 핍박은 줄기차고 또 집요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 당국자들의 혐오감과 적대감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로마 제국의 초기 역사에서 기독교와 유대교가 겪었던 상반된 운명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현대인의 시각을 벗어나 철저하게 1세기 당시 로마 시민의 시각으로 돌아가야 한다. 옥타비아누스의 통치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는 단순한 정치 시스템의 변화를 넘어서, 분명한 시대적 전환점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 이후 로마는 200년간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 도로는 시원하게 잘 포장되었고, 누구나 그 도로 위를 산적의 위험 없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지중해의 바닷길 역시 악천후 외에는 항해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없었다. 예전에 지중해는 해적이 활보하는 곳이었지만, 팍스 로마나 시대에는 상업이 번성해 육로와 해로를 가릴 것 없이 늘 장사꾼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그 시대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통일성'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언어가 통일되고 화폐가 통일되고 경제단위가 통일되었다. 로마는 공권력의 무리한 사용 없이 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완전한 통일을 위해 옥타비아누스 이후 제국의 황제들은 다음 두 가지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갔다.
첫째, 종교적 혼합 정책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각 지방의 전통 신들이 결국은 동일한 존재라고 가르친 헬라적 종교관을 반영한 것이다. 언어의 차이로 인해 신들의 이름이 지방마다 다르게 불렸을 뿐, 결국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혼합절충주의가 당시의 종교적 코드였다. 로마의 만신전에는 각 지방에서 올라온 새로운 신들의 목록이 계속 추가되어 사제들에 의해 분향되었다. 옥타비아누스 이후의 황제들은 선(先) 황제의 정책을 보다 정교화, 그리고 체계화시켜 추진하면서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도 오직 자신들의 유일한 하나님만 예배하고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고집 센 맹신자'로 보였고,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당나귀를 숭배하는 자'로 조롱받았다. 더 나아가 사회적 안녕을 위해 언젠가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암적인 존재라는 인식이 동시대 로마 시민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로마 시민들의 이런 사고는 헬라 문명으로 동-서방의 세계를 통일한 스스로에 대한 우월감이 바탕에 깔려 있다. 로마인의 시각에서 볼 때, 동방은 그저 오랑캐들이 모여 사는 야만의 땅이요, 당시의 거역할 수 없는 대세인 '세계화'의 흐름을 역행하는 찌질이들의 땅에 불과했다. 로마 역사에서 수에토니우스는 동방에 대한 당시 로마인들의 시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역겨운 것은 동쪽에서 온다.'
이들이 볼 때 유대교와 기독교는 동방의 시리아 속주에 딸려 있는 작은 유대 땅 촌구석에서 탄생한 신비적인 미신에 불과했던 것이다.
둘째, 황제숭배 정책이다. 옥타비아누스 이후로 황제들은 죽은 후에 원로원에 의해서 신(神)으로 선포되었다. 황제는 죽은 후에 로마 제국을 지키는 수호신들의 목록에 추가되었고, 시민들은 신전에서 죽은 황제의 이름으로 향불을 피우며 제국의 안녕을 기원했다. 이러한 황제 숭배를 로마 당국자들은 시민의 통일성과 충성심을 굳게 다지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황제의 상 앞에서 향불을 피우는 것은 제국의 번영을 위해서만 행해졌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반역' 내지는 최소한 '불충'과 '애국심 부족'으로 비난받을 소지가 충분했던 것이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울타리 안에 있었던 초기에는 로마 당국자들도 기독교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로마 제국은 유대인의 독특하고 오래된 신앙을 이미 인정하고 있던 터라 그 분파에 불과한 기독교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로마 당국이 보인 이런 소극적 관용은 사도(대표적으로 바울)들을 통한 기독교의 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인들의 활동은 로마 당국의 레이더망에 수시로 포착되었고, 결국 국가와의 본격적인 충돌로 치닫게 된다. 이 시점에서 유대교와는 달리 기독교만이 불쑥 튀어 나와 국가와의 충돌 상황을 맞게 된 데는 다음 세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 기독교인의 갑작스런 증가로 인한 존재감의 부각이다. 유대인과 달리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선교에 열정이 많았고, 다양한 지역에서 상당한 개종자들을 얻으면서 기독교만의 '미친 존재감이 입소문을 타게 된 것이다. 유대교는 유대 민족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민족 종교'로서의 특수성을 인정받았지만, 기독교는 이방인 세계로 급속히 퍼져나가면서 '국적 불명의 신흥 종교'란 꼬리표를 달게 된 것이다.
둘째, 로마에 대항한 유대인들의 봉기로 인한 불똥이 기독교인들에게도 튄 것이다. 유대 땅에서 일어난 유대인들의 봉기는 진압되었지만, 너무 시간을 오래 끈 탓에(무려 7년, 66-73년) 세계 최강으로 알려진 로마 군의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유대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로마 제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전하는 기독교인들은 반역을 선동하는 무리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종하는 예수가 로마법에서 보면 십자가 처형을 당한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셋째, 유대교에서 분리된 독자적인 기독교가 로마인들에게 부도덕하고 경건하지 못한 사교(邪敎) 집단으로 비쳐진 것이다. 이것은 주로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신자들이 서로를 향해 '형제, 자매'로 부르는 초대교회의 관습은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성적(性的)으로 문란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이집트에서 이런 호칭은 성관계 파트너를 부를 때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배 후 '평안의 키스'를 나눈다는 표현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게다가 '예수의 몸과 피를 마신다'는 애찬식의 표현은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 기독교인들이 식인 풍습이 있는 것으로 와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