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멸망까지
열린다 교회사

2. Part 1 플라비우스 왕조(주후 69-96년)

1부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주후 70년부터 로마제국이 멸망하는 476년까지, 400여 년의 시간을 다루고자 한다. 흔히 '초대교회사'로 불리는 이 시기 동안 함께 살펴볼 세계사는 주로 로마제국의 역사다. 여기서는 로마제국의 역사를 기본적인 틀로 삼아 몇 개의 시기를 구분한 후에 그 시기에 해당하는 로마의 역사와 교회사를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공화정의 틀을 벗은 제정 로마, 즉 로마제국의 역사는 옥타비아누스부터 시작되는데, 이후 200년에 가까운 시간은 역사에서 흔히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 시대로 불린다. 이 시기에 등장했던 로마 황제들의 면면을 간략히 소개해보겠다.

팍스 로마나 시대를 이끈 로마의 황제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옥타비아누스(주전 31-주후 14년)
티베리우스(주후 14-37년)
가이우스(주후 37-41년)
클라우디우스(주후 41-54년)
네로(주후 54-68년)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주후 69-79년)
티투스(주후 79-81년)
도미티아누스(주후 81-96년)
오현제
네르바(주후 96-98년)
트라야누스(주후 98-117년)
하드리아누스(주후 117-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주후 138-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주후 161-180년)

이번 장에서는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기에 해당하는 주후 69-96년까지를 다루려고 한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

주후 68년 네로 황제의 죽음은 초대 황제인 옥타비아누스 때부터 내려온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듬해인 주후 69년은 황제가 되겠다고 나선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장군의 암살,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즉위로 인해 로마 역사에서는 '한 해에 무려 4명의 황제가 등장한 해'로 기억된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등장하면서 로마 제정은 그와 그의 두 아들(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이 차례로 즉위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로 불리는 새로운 왕조가 개막된다.

베스파시아누스(주후 69-79년) : 우주의 보존자

네로의 죽음 이후 로마제국을 뿌리째 흔든 대혼란을 평정한 베스파시아누스는 동시대 로마인들로부터 우주의 보존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황제에 걸맞지 않은 지극히 검소한 생활로 인해 그가 통치한 10년은 피로감에 지친 제정 로마에 꼭 필요한 회복의 시간이 되었다.

황제 숭배와 관련된 베스파시아누스의 재미난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는 로마의 황제 숭배를 경멸했는데, 임종이 가까워오자 신하들과 이런 농담을 즐겼다고 한다.

“아무래도 내가 점점 신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소.”

이 말은 로마에서 선정을 베푼 황제가 죽으면 곧 신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곧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티투스(주후 79-81년) : 인류의 애인

아버지가 맡긴 유대 반란 진압의 특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돌아온 티투스는 주후 71년 로마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교회사에서는 그저 ‘성전을 파괴한 황제’ 정도로 터부시되지만, 사실 티투스는 주후 1세기 로마에 등장한 황제 가운데 가장 성군(聖君)으로서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유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몇 년간 유대 땅에 머문 티투스는 아그립바 2세의 누이인 버니게를 사랑하게 된다. 버니게는 삼촌(칼키스 지역을 통치한 헤롯)과 결혼했지만 남편이 죽자 미망인이 되었고, 이후에는 오빠(아그립바 2세)와 동거를 하면서 당대 최고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게다가 버니게는 티투스보다 무려 12살이나 많은 연상의 여인이었다. 버니게를 사랑할 당시 티투스는 딸을 하나 낳은 아내와 이혼했기 때문에 화려한 싱글로 돌아온 상태였다.

하지만 황제가 된 티투스는 오리엔트 공주 출신인 버니게와의 결혼을 로마 시민들이 강하게 반대하자 자신에게 찾아온 운명적인 사랑을 포기하고 만다. 로마 시민들에게 '오리엔트 공주'라고 하면 악명 높은 클레오파트라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티투스는 버니게와 헤어진 후에도 새로운 결혼 상대를 찾지 않고 30대의 한창 나이임에도 독신을 고수했다. 티투스는 󰡒남들 위에 서있는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보다 자유가 제한된다󰡓는 말을 남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금언을 늘 실천에 옮기며 살았던 것 같다.

황제로서 티투스는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성품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인류의 애인'으로 찬양을 받았다. 다만 안타까웠던 것은 티투스가 고작 2년의 짧은 통치를 마치고 과로사로 죽었다는 것이다. 티투스가 과로사로 죽은 것은 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연거푸 일어난 재난을 수습하기 위해, 황제라는 직위가 무색할 정도로 피해 복구 작업을 위해 동분서주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재난은 즉위 첫해인 주후 79년에 찾아온 베수비오 화산 대폭발이었다. 이 화산 폭발은 역사적으로 폼페이 시를 통째로 삼켜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두 번째 재난은 주후 81년에 로마를 덮친 전염병이었다. 연이은 재난을 복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티투스는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온천 요양을 떠나지만, 온천에 도착한 지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41세도 채우지 못한 젊은 황제에게 찾아온 참으로 애석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