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멸망까지
열린다 교회사

13. 위기의 3세기 2번째

발레리아누스(253-260년)

63세의 고령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 발레리아누스는 37세가 된 아들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한 후 곧 국난 수습에 나섰다. 제국은 어느덧 한 명의 황제가 대처하기에는 심히 버거운 위기 상황의 연속이었다.

발레리아누스는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로마 군의 지휘관급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 개편을 단행했다. 이때 순수하게 실력 위주로 군단장을 뽑다보니 아무래도 제국의 최전방인 도나우 강 남쪽의 판노니아와 모이시아 속주 출신들이 대거 승진의 기회를 잡았다.

3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군인 황제들은 대부분 이때 군단장으로 승진한 사람들 가운데 많이 탄생하게 된다.

발레리아누스도 교회사에서는 기독교를 핍박한 황제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다. 아무래도 제국을 덮친 어려움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타개하려고 애쓴 황제일수록 기독교 탄압에도 적극적이었다는 것이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아이러니이다.

발레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언급하려고 한다. 어쨌든 발레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는 꽤 철저했지만 이번에도 흐지부지하며 끝이 났다. 동쪽 전선에서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가 다시금 공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로마가 북방 야만족에 대처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는 틈을 이용해 ‘기회 포착의 달인’인 샤푸르 1세는 서방으로 진격할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다. 70세가 다 된 고령의 황제는 공동 황제인 아들을 수도에 남겨두고 동방의 전선으로 향했다.

페르시아 전쟁의 출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서방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발레리아누스는 실력 있는 젊은이들로 군단의 장교들을 대거 물갈이했다. 이때 등용된 인재 가운데 훗날 로마의 골칫거리가 되는 팔미라(시리아의 교역 도시) 출신의 유력한 시민인 오데나투스도 있었다.

로마는 처음 얼마 동안 연전연승을 거두며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것은 로마가 강했기 때문이라기보다 페르시아가 생각보다 약했기 때문이다.

샤푸르 1세는 페르시아 역사에서 가장 영웅시되는 군주로서 고레스에 버금가는 계몽 군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과학과 의학 등 학문을 사랑하고 예술을 깊이 이해하고 기술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샤푸르 1세는 분명 뛰어난 정치가였지만 전쟁터에서만큼은 번번이 자신의 무능함만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가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전투에서의 초라한 승률이 이를 잘 보여준다.

페르시아 전쟁은 초반만 해도 분명 로마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260년 새해 벽두부터 전 세계를 화들짝 놀라게 할 깜짝 뉴스가 전해졌다. 그것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 왕 샤푸르 1세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황제가 산 채로 포로로 잡힌 것은 로마 역사상 발레리아누스가 최초였다. ‘어떻게 갑자기 상황이 반전된 것일까’ 싶지만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샤푸르 1세가 제안한 정상회담을 곧이곧대로 믿은 발레리아누스가 휘하의 소수 장교들만 데리고 약속 장소에 갔다가 생포당했다는 것이 많은 역사가들의 추론일 뿐이다.

갈리에누스(260-268년): 아버지를 버린, 임기응변의 땜빵…

황제가 생포되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사람은 로마 군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지휘관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발레리아누스에 의해 발탁된 군단 내의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로마에 있는 황제 갈리에누스가 당장 구출 작전에 나서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42세의 갈리에누스는 아버지를 버렸다. 그가 의도했다기보다는 당시의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가 생포된 260년을 기점으로 로마는 전례 없는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사실 이때 제국이 그대로 붕괴되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로마는 전대미문의 위기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동방에서 일어난 변고는 북방의 야만족들에게도 빠르게 전해졌고 이 소식을 들은 야만족들은 사기가 충천되었다. 이때 야만족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국경을 넘어오면서 300년 동안 로마제국을 든든히 지켜주던 라인 강-도나우 강 방어선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페르시아와 대치 중인 제국의 동방 국경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로마 황제를 생포한 샤푸르 1세는 내친 김에 시리아 속주로 쳐들어왔고 군단장들은 방어에 성공하면 즉시 황제를 자칭하고 나섰고 이런 무정부 상태는 적국인 페르시아만 더욱 이롭게 할 뿐이었다.

동방에서 우직하고 일관되게 페르시아 군을 막아낸 사람은 로마인이 장사꾼으로밖에 보지 않던 팔미라 출신의 오데나투스밖에 없었다.

갈리에누스는 단독 황제로 통치한 8년의 시간 동안 수도 로마에는 거의 머물지 않고 야만족의 침입을 막아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다녀야 했다.

그가 이렇게 감당키 힘든 격무에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에 그의 나이가 42세에서 50세를 향해 가는 한창 나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갖 악평만 얻었는데, 이것은 그가 허둥지둥 다니면서 근본적인 위기 타개책보다는 매번 일시적인 미봉책으로만 일관했기 때문이다.

갈리에누스가 범한 첫 번째 실수는 그가 단독 황제로 통치한 첫 해에 트리어를 수도로 한 갈리아제국이 창설되면서 로마제국의 서쪽 절반이 통째로 떨어져나감으로써 찾아왔다. 갈리아제국의 황제를 자칭한 포스투무스는 항상 선두에 서서 야만족을 격퇴한 용장이었기 때문에 갈리아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선 차라리 제국에서 떨어져나가는 편이 낫다고 여기며 새로운 황제를 옹립한 것이다.

갈리에누스는 진압에 나섰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갈리아제국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차피 그가 야만족만 잘 막아내준다면 갈리아 속주의 ‘총독’에서 갈리아제국의 ‘황제’로 직함을 바꾸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갈리아제국은 이런 이유로 274년에 소멸될 때까지 14년 동안 존속하게 된다. 하지만 황제의 이 결정은 로마제국의 수많은 속주들에서 독립에 대한 요구가 도미노 현상처럼 번져나갈 것이 뻔했기 때문에 참으로 어리석은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황제의 또 다른 실책은 수시로 북방 방어선을 넘어오는 게르만족 일파와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황제는 야만족들이 방어선 안쪽의 로마 영토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하고 대신 그 지역의 방위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야만족에게 야만족 방어를 맡기기로 한 이 황당한 결정으로 인해 로마 군단 내에서는 황제가 야만족 족장의 딸을 애첩으로 두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 조치는 제국의 방위를 야만족에게 맡긴 최초의 사례가 되었고 당대뿐 아니라 후대의 역사가들에게서도 심한 혹평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황제보다 더 충실하게 로마를 지키는 사람이 급부상했는데, 그가 바로 팔미라 출신의 오데나투스였다. 로마는 팔미라가 속한 시리아 지역을 속주로 만들면서 캐러밴(장사나 여행 목적으로 사막을 오가는 무리들)을 터는 것을 주 수입원으로 하는 베두인 강도떼들을 로마 군의 보조 전력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시리아 사막의 작은 오아시스 도시에 불과하던 팔미라는 ‘사막의 진주’라는 찬사를 듣는 교역 도시로 눈부신 성장을 했다. 그런 점에서 팔미라도 그 시대가 안겨준 팍스 로마나의 대표적인 산물이었다.

팔미라의 방어는 오랜 세월 동안 로마 군이 맡아주었기 때문에 그곳에는 자체적인 무인의 혈통이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동방이 거의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팔미라 출신의 오데나투스는 자체적인 방위군을 조직해 도시를 방어했고 주민들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준 그를 마치 군주처럼 따랐다.

발레리아누스가 생포된 후 샤푸르 1세가 퍼붓는 파상적인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낸 사람도 동방에서는 오데나투스밖에 없었다. 갈리에누스는 지금까지 해왔던 정책의 일환으로 오데나투스에게 동방 최고사령관의 직위를 주면서 그를 적절히 활용했다.

하지만 황제는 오데나투스의 통치 영역을 시리아 속주에만 한정했고 소아시아와 이집트는 제외시켰다. 이것은 오데나투스의 세력이 너무 커져 황제도 다루기에 버거운 상대가 되는 것을 미연에 막고자 함이었다. 오데나투스는 이런 황제의 기대에 확실하게 부응했고 로마가 최고의 윤리로 생각하는 ‘신의’를 끝까지 지켰다.

하지만 267년, 고트족을 막아낸 것을 기념한 잔치 석상에서 오데나투스가 조카의 칼에 찔려 죽으면서 황제와 오데나투스 간의 환상적인 우호 관계도 단절되고 만다. 오데나투스의 아내 제노비아는 즉시 어린 아들을 남편의 후계자로 세우고 자신은 섭정으로 나서며 실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팔미라 여왕’으로 불리는, 로마인들에게는 악녀로 각인된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시키는 제노비아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제노비아는 비록 여자였지만 남편과 달리 야심이 많았다.

제노비아는 시리아 속주에만 머물지 않고 로마가 궁지에 빠진 틈을 이용해 이집트와 소아시아 지역까지 야금야금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이로써 로마제국은 갈리아제국, 로마제국, 팔미라 왕국으로 삼분되는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된다.

황제의 개인적인 영지이자 이탈리아 본국 주민들을 먹여 살리는 밀의 1/3을 해마다 공급해오던 이집트가 제노비아의 수중에 떨어지자 황제로서 갈리에누스가 버티고 있던 마지막 발판이 무너졌다. 결국 268년 가을, 갈리에누스는 군부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268-270년):

클라우디우스란 이름 뒤에 고티쿠스란 별명이 붙은 것은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한 그에게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1세기에 이미 클라우디우스 황제(주후 41-54년)가 있어서 동명이인 황제를 구별하는 의미도 있다.

물론 둘 사이에는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다. 일리리아(현 크로아티아 부근) 지방의 농촌에서 태어난 클라우디우스는 부모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하류층에 속했다. 하지만 고트족을 수차례 격파한 공적으로 인해 황제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클라우디우스는 군사적 재능뿐 아니라 통치 면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는데, 포로로 사로잡은 고트족 남자 가운데 젊고 건장한 사내는 로마 군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사내는 무장을 해제시킨 후 국경에 있는 모이시아 속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도록 했다.

이로써 야만족의 약탈로 황폐화된 국경 지역의 인구 감소를 막고 농산물 생산량을 늘리고자 한 것인데, 이 정책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에게 불운은 쿠데타도, 야만족도 아닌 전염병을 통해 찾아왔다. 불과 1년 반의 짧은 통치 뒤에 전염병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의 동생인 퀸틸루스를 황제로 지명했다. 군사적 능력은 평범했지만 성품이 온순해 원로원이 다루기 쉬울 것으로 여겨져 황제 지명은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하지만 군단에서 원로원의 결정에 제동을 걸었다.

제국의 현 상황에서는 탁월한 무장이 아니면 로마군 통수권자이기도 한 황제의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장병들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장병들은 만장일치로 로마군 기병 총사령관인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고 원로원도 어쩔 수 없이 이를 승인했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퀸틸루스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을 택했다.

아우렐리아누스(270-275년)

동시대 역사가들이 오랜만에 로마인의 혼을 가진 황제가 등장했다고 격찬을 마다하지 않은 아우렐리아누스는 3세기에 등장한 로마 황제들 중 단연 군계일학에 해당한다.

오늘날 로마를 방문하면 고대 성벽을 볼 수 있는데, 이 성벽을 쌓은 주인공이 바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다.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으로 불리는 이 성벽의 완공은 그가 죽은 지 1년 후인 276년에야 이루어졌다.

아우렐리아누스가 넘겨받은 로마제국은 삼분된 상태였고, 당시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가 딱 적격이었다. 하지만 제위에 오른 그는 산적한 문제들을 분석해 우선순위를 정한 후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정력적으로 황제의 직무를 감당했다.

우선 로마제국에 적대 행동을 하지 않는 갈리아제국 문제는 뒤로 미루었다. 또한 팔미라 왕국 역시 로마에 대한 직접적인 도발을 하지 않았던 탓에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아우렐리아누스가 최우선 순위로 정한 것은 북쪽 국경에서 난동하는 야만족에 대한 대책이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침입해오자 이들을 바로 격퇴하지 않고 이들이 돌아가는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이들이 약탈한 재물과 사람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진 틈을 이용해 총공격하는 전법을 구사해 전멸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목표물은 팔미라 왕국의 제노비아 여왕이었다. 팔미라 군은 교역으로 쌓아 올린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사방에서 긁어모은 다국적 용병들로 이루어졌다.

제노비아 여왕이 자신을 향해 진격해오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를 오히려 얕잡아본 것도 경제력 면에서 자신이 월등히 우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노비아는 아우렐리아누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272년, 팔미라는 함락되고 제노비아는 로마로 압송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동방 총사령관으로 자신의 부장인 프로부스를 임명하고 로마로 돌아갔다.

팔미라 공방전이 한창인 가운데 교회사와 관련된 재미난 막간극이 펼쳐지는데, 내용인즉슨 기독교회에서 로마 감독과 안디옥 감독 중 누가 우위에 있는가를 두고 싸우다가 두 감독이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찾아온 것이다.

황제는 무슨 기준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로마 감독이 우위에 있다고 판결을 내렸다. 아우렐리아누스가 내린 판결은 로마 감독이 우위에 있음을 알린 최초의 판결이었는데, 이런 판결이 기독교도가 아니라 이교도 황제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럽다.

다음 표적은 마지막 남은 갈리아제국이었다. 칼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느낀 갈리아제국 황제는 밤늦게 아우렐리아누스의 막사를 찾아와 항복의 뜻을 밝혔고, 이로써 이튿날 양군 사이를 오간 것은 화살이 아니라 병사들이 질러대는 환호성이었다.

이로써 삼분된 제국을 순식간에 통일한 아우렐리아누스는 274년에 수도로 돌아와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개선식을 거행했다.

제국을 통일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다음 목표물로 페르시아를 겨냥했다. 그에게는 자신을 발탁해준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치욕을 씻어주겠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당시 페르시아의 상황이 유능한 황제였던 샤푸르 1세가 죽은 후 후계자 다툼으로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입장에서는 황제가 생포된 전대미문의 치욕을 앙갚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275년에 있었던 페르시아 원정은 황제가 그리스 출신 노예 비서에게 암살당하면서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어이없이 생애를 마친 아우렐리아누스가 만약 천수를 누렸다면 이후 로마의 역사는 분명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타키투스(275-276년)

아우렐리아누스가 암살된 후 로마제국은 무려 5개월 동안 황제의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원로원과 로마 군 사이에는 후계자 선정을 놓고 서로 상대에게 공을 넘기는 서한이 세 차례나 오갔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1세기 당시 역사가인 타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것을 유일한 자랑으로 여기는 75세의 타키투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타키투스는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 바닥난 로마제국의 국고에 기부함으로써 의욕적으로 황제의 직무를 시작했다. 해가 바뀌자마자 타키투스는 페르시아 전선으로 떠났지만 행군 도중 시리아에서 죽고 만다.

이것은 3세기의 로마에서 너무도 흔했던 암살이 아니라 고령으로 인한 자연사였다. 원로원은 타키투스의 아우를 차기 황제로 지명했지만, 로마 군은 이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동방 총사령관으로 직무를 수행 중이던 프로부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프로부스(276-282년)

장병들의 자발적인 추대로 황제에 오른 프로부스는 수도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동방의 국경을 지켰다. 3세기 후반의 황제들에게 수도 로마는 야만족이나 페르시아를 무찌른 뒤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잠깐 들르는 장소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프로부스는 오랜만에 적이 쳐들어오면 맞아 싸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쳐들어가서 격파하는 적극 전법을 구사하며 북쪽의 야만족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이런 프로부스도 병사들의 단검에 맞아 암살되면서 허무한 종말을 맞게 된다.

카루스(주후 282-283년)

황제를 살해한 병사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고 군대는 다음 황제를 고르기 위해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차기 황제로 황제의 오른팔이자 근위대장이었던 카루스를 지명했다.

58세의 카루스는 두 아들을 공동 황제로 지명하고 맏아들은 로마로 보내 서방의 방위를 맡기고 자신은 둘째 아들과 함께 페르시아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동방으로 출정했다. 283년 봄부터 시작된 페르시아 전쟁은 로마 군의 연전연승으로 펼쳐졌고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마저 손쉽게 함락했다.

로마 군은 계속 동쪽으로 진격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페르시아 세력을 완전히 일소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진군 도중 무시무시한 천둥번개가 쳤고, 이때 황제는 벼락에 맞아 즉사했다. 황제가 죽자 군대는 이미 공동 황제였던 둘째 아들 누메리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누메리아누스는 그의 장인의 손에 암살되었다. 황제의 경호 책임자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암살범을 단칼에 베어버렸고 병사들은 그를 차기 황제로 추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