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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

2014년 6월호에 수록된 특별대담입니다.

이대귀 : 김재우 선교사의 내한으로 편집위원 전부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다. 선교한국 2014대회 찬양인도자 세 명과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한, 여러모로 의미 있는 자리다. 최근 세월호 참사 등으로 한국 정서가 요동치고 있다. 혹자는 세월호 전과 후로 한국사회가 갈릴 것이라고 볼 정도로 큰일이다. 이번 사건이 국내 여러 분야 뿐 아니라 기독교계, 또한 예배사역의 과제들을 노출시킨 것 같다. 예배사역자들은 어떤 입장이어야 하는지 혼란을 갖는 것 같다.

이번 사건에 대해 세 가지 정도의 분류가 있는 듯하다. 첫째, 믿음으로 슬픔을 극복하자는 맹신과 승리주의의 전형들이다. 둘째, 모든 것은 주님의 계획이라는 전제 아래 침묵과 경건, 관찰자, 관조자이기를 자처하고 권장하며, 나아가 양비론을 펴는 경우다. 마지막으로 가만히 있지 말라, 행동하라를 말하는 급진적 복음주의다. 이런 세 가지 흐름 또는 그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듯하다. 애가의 부재, 신학의 혼란과 미정립 등이 두드러진다. 여러분은 어떤 의견인가. 또 다 함께 지향할 지점은 무엇일까?

전은주 : 내 개인적으로는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계속 예배했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제3자적 입장에서 ‘이럴 땐 어떤 노래를 부르면 저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같은 마음이 컸다면, 점차 ‘사고가 났다’는 차원을 넘어 정의와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문제와 닿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더 충격적이었다. 근데 이게 교회의 문제인지 사회의 문제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의 흥분도에 비하여 실제로 이 문제를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 이것에 대한 진짜 질문과 문제 제기자들이 정말 많은가, 아니면 이 감정도 붐인가?

이대귀 : 실제로 여러 집단에 따라 그 현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 같다.

전은주 : 페이스북에서 본 것과 실제 만난 사람의 느낌이 달랐다. 무리의 여러 감정과 생각의 총합이 꽤 다르게 체감돼서 당황스러웠다. 초반에는 ‘내 역할이 남이 아픈 걸 아파할 줄 모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죄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만으로도 ‘정의’의 영역으로 주제를 옮기기 이전에 이미 우리 감정의 어느 부분들이 정말 많이 손상되어 있는 것이라고 본다. ‘자기 문제가 아니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첫 번째 감상이 이것이었다.

김영범 : 정말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전은주 : 그 이후, 세월호 사안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면서 말씀을 다시 보기 시작했는데, ‘선지자나 예언자나 다 자기 유익을 구하고,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지만 내 딸 내 백성이 울고 있는데…’라는 말씀을 읽는데 소름이 돋았다. ‘우리 예배에 이런 요소가 정말 많이 있구나.’ 다윗의 시편들은 대부분 애가로만 끝나지 않고 전환이 있지만, 다윗이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기까지는 스스로가 풀어낸 시간이 있었을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반복을 통해서 언젠가는 다윗이 진짜 힘든데도 바로 찬양할 수 있게 되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났기 때문에 말이다.

그 반면에 우리는 지금, ‘슬픈 마음 있는 사람’으로 노래가 출발했지만, ‘천국의 기쁨일세’로 그 노래를 3분 안에 끝내지 않나. 이게 정말 아이러니한 것이다. 아직 동의되지 않는 마음을 끌고 가서 거기까지 고백을 하게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잠시 멈춰야 하는 걸까. 그리고 그 기다림이 언제까지여야 하는 걸까. 또한, 회중은 이 일에 공감하지 않고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가이드하는 것이 내게 적합한 역할일까.

이대귀 : 예배인도자로서 느끼는 어떤 ‘한계'를 절감했을 것 같다.

전은주 : 내가 선택했던 태도는, ‘공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게 정의의 문제나 모든 것을 다 떠나서 하나님의 몸의 일부인 피조물 일부가 신음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최소한 함께 경험하고 함께 신음하려고, 애는 써봐야 한다.’ 였다. 거기까지가 내가 리드할 수 있고 가이드해 줄 수 있는 역할의 전부였던 것 같다. 거기서 느끼는 안타까움이 있다. 어떤 설교자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런 찬양인도자의 가이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서 민폐를 끼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아니면 더 힘을 받아서 공의와 정의의 부분까지 건드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우리 예배 안에서 문제를 직면하고 뚫고 지나가 하나님을 예배하라’가 아닌, ‘문제를 덮고 예배하라’, ‘이 문제 없다고 생각해, 빨리 여기로 돌아와서 예배해’ 라는 느낌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그러나 비판만 할 수 없는 것이, 나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함께 울고 하지만, 이 시간 안에 어느 방향으로 가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 모르겠다. 대표성을 지닌 사역팀에서 사역을 하기 때문에 받는 강박인건지.

김영범 : 대표성을 지닌 사역팀에서 사역을 하므로 아무래도 부담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은주 : 그런데 그건 있더라. 그 기간에 희한하게 사역이 되게 많았다. 강의도 공연도 집회도 설교도 했다. 근데, 희한하게 오히려 그냥 노래를 하면 훨씬 쉬운 거다. ‘예배, 결국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 내가 그 상황에서 하나님 찬양하는 것에는 아무 불편함이 없는데, 내 마음에 드는 불편함은 이런 거였다. 어노인팅 집회는 불특정다수의 누가 있을지 모르지 않나. 거기서 내가 어떤 노래를 함으로써 오히려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참, 어렵더라. 어디까지가 정서에 대한 배려이고, 어디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눈을 돌려야 하는가 문제와, 과연 ‘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들어주는 역할이 언제까지여야 하겠는가’하는 문제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매주 주일 예배를 하는데,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만약 10주 동안 계속 애도하는 예배를 한다고 생각하면, 그걸 수준이라고 말하든 의식 없음이라고 말하든, 이 사람들의 필요는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럼 이 사람들의 필요도 만져줘야 하는데, 내가 예배를 통해서 계속 가르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 부분을 공감하지 못하면 너는 문제가 있다’ 라고 강요하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오히려 공연일 때는 내가 내 컨텐츠를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테니까 ‘동의하셔도 좋고 반대하셔도 좋습니다’ 라는 열린 결말을 제안하는 일이 가능한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질문이, ‘내가 예배를 너무 규격화해서 생각하는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예배인도자는 그게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가이드 해 주는 역할이다. 공동체 목회자가 아닌 치고 빠지는 사역에서 ‘니네 맘대로 생각해, 나도 하나님 앞에서 속상하다’ 그렇게만 하고 돌아오는 게, 그게 정말 지금 책임 있는 걸까 무책임한 걸까 고민하게 되는 거다.

김영범 : 사실 예배사역의 문제 이전에, 먹는 사진 노는 사진 언제까지 안 올려야 하나, 무한도전은 언제까지 결방해야 하나, 다들 똑같은 고민일 것이다. 강요하지 않는 마음은 필요하다. 다만, 공감해야 하는 것은 푸쉬할 필요가 있는 게, ‘이웃을 내 몸 같이’라고는 했지만, 실상 다들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정하는 부분은 ‘이게 내 일이라고 다가오지 않으면 그만큼 안 힘든 게 사람’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세월호는 현재진행형이다. 처음엔 무뎠던 사람조차도 자꾸 장면들과 얘기를 들으며 감정이입이 되는 거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이 많이 눌렸던 거 같다. 그럼 ‘언제 이걸 탈출해서 전환할 거냐’에 대해서는 딱 답을 얘기할 순 없을 거 같다.

전은주 : 차라리 공연을 할 때는 너무 편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십시오.”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반면, 불특정 다수 앞에 서 있는 예배인도자는 과연 어디까지 돌아봐야 할 것인가. 이게 ‘돌아보지 말자’라는 입장은 결코 아니다. 그 상황을 돌아봐야 하는데 그게 어디까지 민감해야 하는 건가. 그냥 단지 “성령에 민감해”라고 말하기엔 정말 늘 기준이 다를 수 있고, 기준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영범 : 우리의 일차적인 최선은 일단, ‘내 감정이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들을 배려하고, 기쁨을 감추는 것조차 필요한 태도’였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기쁜 노래 안 부를 수 있다.’ 이다. 그 사건 직후가 부활절이었다. 부활절의 기쁨을 자제하는 것도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몹쓸 거였다. ‘왜 우리가 하나님 예배하는 걸 이런 것 때문에 쉬어야 되는 거냐’는 식으로 말이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참해서 감사했다. 그래도 그런 메시지, 그런 걸 담아낼 수 있는 노래, 부를 노래가 없다는 점은 한계였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나도 되게 싫은 게 3분 5분 안에 답이 나와 있다. ‘아 뭘까’라고 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코러스에 답이 나온다. 주님만이 답이시고 어쩌고, 그런 부분에서 애가의 부재가 우리를 가장 힘들게 만든다. “인도자가 부를 노래가 없다.”

조금 다른 측면을 보면 이번에 다 발표된 건 아니지만, 일반 가수들이나 내 주변 몇몇 사역자들이 애가를 만들게 되더라. 그게 어쩌면 이만큼 체감되는 큰 슬픔을 맛보니까 이제야 우리 안에서 그런 노래가 나오는 거다. 그전에는 이만큼의 큰 슬픔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애초에 그걸 담아낼 계기도 없었고, 그런 감정이 뭔지도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그 감정을 사실 가족의 사별 등을 겪을 때조차도 꾹꾹 눌러 오지는 않았나. 대부분 우리에게 주입되었던 신앙 자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해야 하고 기뻐해야 하고’를 너무 세뇌당했기 때문에 슬픔을 억지로 눌러서라도 기쁘고 감사한 척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말이다. 지금은 다 슬퍼하는 분위기니까 마음껏 표출한다. 근데 예전에 혼자 힘든 일은 솔직히 주변에서 그만큼 공감을 안 해 준다. 그러니까 표출을 못 한 것도 있다.

이대귀 : 애가가 지금까지 많지 않았던 이유가 따로 있지는 않았을까.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은주 : 예배 안에서 예배곡으로 애가를 부른다고 할 때, 애가가 없었던 것에 대해서 나도 통탄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회중찬양으로 애가가 필요했었던 일이 없었던 거다. 그동안 6∙25 이후로, 특히 ‘경배와 찬양’이라는 형태를 경험한 이후로, 공동체가 다 같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슬프다고 고백할 만한 가장 큰 상황이지 싶다. 그만큼 공동체가 다 같이 슬프다고 노래할 만한 일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개인의 가족이 돌아가시거나 하면 그 사람에게는 이것과 동일하거나 더 큰 슬픔이지 않나. 그때 그 사람은 혼자 개인 노래를 썼을 수는 있어도 이걸 공동체가 부르라고 내놓을 일은 거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이번 같은 상황은 정말 특수해서, 다 같이 너무 많이 연루되어 있고 다 같이 아프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필요해진 부분이 아닐까. 처음에는 ‘와 전은주 너는 애가도 안 썼어’ 라고 생각을 했는데, 찾아보니까 이 상황에 맞는 노래가 없었다. 이렇게 공동체가 다 같이 하나님 앞에 슬퍼할 만한 노래를 쓸 상황이 구체적으로는 없었다.

김영범 : 춘천에서 <여호와여 어찌하여>를 불렀다. 근데 이번에 딱 그런 거다. ‘왜 멀리 서시며 숨으시나이까’ 이 구절이 생각나서 그 가사와 작년 영상을 나누니까 굉장히 많은 사람이 공감하더라. 애초에 시편에 이런 얘기가 있고, 이런 얘기가 필요하고, 내가 토로하고 싶은 부분을 나눴는데, 사람들이 확 빨아당기는 걸 보면서 정말 필요했구나 싶었다. ‘애가가 필요하냐’의 문제를 얘기할 때, 슬프지도 않은 사람한테 슬픔을 강요하는 것이 난 여전히 폭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뒤집어서, 안 기쁜 사람에게 기쁘다고 강조하는 건 긍정적인 거니까 좋다고 할 수도 없지 않나.

애가에도 정말 국장國葬에 가까운 슬픔을 담아내는 노래가 있고, 그보다 덜 한 정도의 애가도 있을 것이다. ‘허무한 시절 지날 때’ 사실 그 안에도 애가스러움이 있다. 그런 다양한 감정선의 레벨이 있어서 그 때 그 때 필요에 맞는 레퍼토리가 필요한데, 우리에겐 그럴 일이 여태 없었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이 슬픔을 개인 혹은 한 가정만 겪을 때에도 동일한 슬픔 혹은 그 이상의 슬픔이 있겠구나. 오히려 주변에서 함께 슬퍼하지 않는 것 때문에 더 배가되는 아픔이 될 수도 있겠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이미 겪었으니까, 그때 함께 위로해 줄 수 있는 노래, 토닥거려 줄 수 있는 어떤 것들을 마련해야겠다.

김재우 :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레퍼토리가 매우 협소하다. 17, 18세기 들어온 미국의 복음 자체가 내세 신앙적이었고, 원래 받은 복음이 파편화된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시대를 이어가면서 내러티브를 회복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거다. ‘경배와 찬양’도 미국과 서구의 영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고통을 몰랐다면, 고통을 모르는 서구의 젊은이들이 노래한 것을 한 거 아닌가.

그리고 또 하나는 예배인도자의 역할이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려 줄 수 있는 위원회나 이사회가 없고, 그냥 이미 내가 뭘 해야 할지 알고 있고 그걸 문화적으로 강요받고 있는 모양새이다. 미국에서 9∙11 사태가 일어났을 때 전 국민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회들이 평일에 문을 다 열어서 예배를 드렸다. 적합한 노래를 불렀다. 적합한 노래란 답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같이 슬퍼하고 질문을 던진 노래였다.

나 같은 경우엔 이번에 떼제 찬양이 되게 많이 생각났다. 부를 수 있는 게 의외로 너무 많은 거다. <키리에 엘레이손>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제목으로만 수십 곡이다. 그리고 인도자가 역할이 없다. 찬양 안에서 내러티브가 다 있고, 평화와 화해의 공동체. 스토리가 이미 있고 인도자의 감정적인 호소가 없다. 빨간 글씨로 전자시계처럼 책 번호만 나오면 사람들이 책을 펴고 선창만 해주면 된다. 부담감 자체가 없다.

나는 이게 성경적인 내러티브가 너무 파편화되어 있는 것과, 예배인도자가 강요받고 있는 -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역할로 어떤 모습의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 상당히 인위적인 예배의 부작용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라면 하나님께선 아파하고 울고 계시는데, 나는 그거와 상관없이 내 아젠다를 이뤄야 한다는 강요, 바로 ‘예배인도’라는 우리가 갖고 있는 그 파편적인 요구사항 말이다. 한국교회의 문제에서 시선을 돌려보면, 글로벌한 공동체에는 그런 노래 부르는 곳이 있다. 많이 있다. 반면 우리는 없는 거다.

이대귀 : 대한성공회, 정교회, 루터교회 같은 경우도 예배 때 이런 공감하는 부분이 굉장히 자연스럽다. 교회 안에 그런 곡이 존재한다. 그런데 일반 한국 개신교 교회 안에서는 그런 경험 자체가 적은 것이다. 이렇게 노래들이 생긴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안타깝지만, 거대한 슬픔의 반작용으로 그런 곡의 필요를 절감하게 된 것 같다.

김영범 : 지금의 예배는 거의 예수의 인성을 부인한 예배라 봐야 한다. ‘예수님도 슬피 우셨다.’ 이런 게 성경공부 기초에 나오지 않나. 또 십자가 달리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마나 힘드셨나. 근데 우리는 그보다도 못한 슬픔과 아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는 것이다. 예수님도 힘드셨는데, 우리의 선교와 사명과 그 고통을 너무 쉽게 넘겨버리는 것 아닌가 싶다.

김재우 : 고통에 대한 내러티브는 이게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인간의 악이 더 악해진 것도 아니고. 슬픈 일은 사실 되게 많지 않나. 항상 인간의 삶 속에 슬픈 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은주 자매 같은 상황에서 이 예배를 그냥 이렇게 끌고 갈 거냐 라고 봤을 때, 진짜 예배공동체라면 그 상황에서 영적 지도자들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했다고 본다. 그것을 이미 강요받았다고 본다.

전은주 : 오히려 어노인팅 사역을 가면 내 결정권한이 있다. 기뻐하는 곡들 다 빼고, 최대한 빠른 곡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였는데 브릿지 생략, 미디움 템포로 갔다. <비추소서> 다 느리게 다시 편곡하고, <주님 보좌 앞에 나아가> ‘평화 내려 주시는 하나님 나로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게 하소서’ 이런 노래로 계속 했었다. 오히려 그런 데 갔을 때는 팀이 나에게 ‘그거 안 하고 오면 너 짜를거야’ 이러지 않고, 최소한 ‘무슨 상황인지 알겠으니 니 맘대로 해’ 일임했으니까 내가 고민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반면에, 일반 교회에서는 예배인도할 때 이런 부분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라는 인상을 참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참 많은 찬양사역자들이 이런 교회 안에 있을 텐데. 그나마 나는 어노인팅 따라다니며 여러 말씀도 새겨듣고, 여기저기 가보기도 했고, 다른 메시지와 다른 삶을 맛보는 경험을 제공받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일반적이라면 쉽고 빠르게 저 패러다임을 벗어날 순 없겠다. 그러니까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선 굉장히 절망감이 든다.

김재우 : 이건 ‘공동체성’이란 부분과 맞닿은 문제다. 공동체성이 없는 것이다. 메가처치가 아닌 이상, 만약에 100명 미만의 교회라면 고통당하는 사람은 늘 우리 눈에 바로 보이지 않나. 이 이슈가 이번에 극대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에겐 항상 그 짐이 있지 않나.

김영범 : 그 짐이 존재하는데 그 짐을 함께 지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있어선 마치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가사처럼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같은 심정인 거다. 100명인 교회 공동체가 있는데, 난 어제 이별을 했던지, 부도가 났던지, 갑자기 암 선고를 받았든지 해서 하루 사이에 나는 너무 달라진 거다. 하루 사이에 내 애를 바다에서 잃어버린 거다. 근데 아닌 사람들은 여전히 그대로다. 난 그 심정이 이별 문제를 떠나서 그 가사에 참 잘 담겨있다고 본다. 그 감정을 생각하니까 섣불리 위로한답시고 한다는 말들이 ‘아 이게 참 아니구나’ 싶은 거다. 그 사람에겐 세상이 바뀐 건데, 그 사람 앞에서 토닥토닥하고 다른 사람들에겐 “야 그러고 이따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이렇게 되는 거다. 나도 그랬고, 다 그러겠구나. 이게 자연스럽긴 한데, 자연스러운 게 옳은 건 아니지 않나.

난 우리가 예언자적으로 가르치는 사역을 한다면, 그 감정이 없는 걸 비난할 건 아니지만, 우리가 그 감정이 안 드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슬퍼하고 ‘아 이건 아닌데’ 라는 것에 대해서 도전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사실 이걸 목회자가 해야 하는데 목회자가 그 얘기를 싹 다 잘라버린 거다. 사실 찬양인도자는 더 할 여지가 없는데, 노래를 선곡해야 하니까 이런 고민이 발생하는 거다.

김재우 : 그렇다면 공동체성의 문제에서 더 나아가, 세계관의 문제다.

김영범 : 사실 그렇다. 세계관, 신학의 문제다. 사실 이거는 노래 하나의 부재, 이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서도 그랬다. 매트 레드먼이나 마이클 카드를 보면, “우리도 그때 부를 노래가 없었다. 그래서 <주 이름 찬양>같은 노래가 나왔다”고 했다. 애가의 부재는 비단 우리만의 상황이 아니지만, 우리는 더더군다나 강요받는 게 있으니까 이건 신학의 문제, 세계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대귀 : 이런 주제들이 좀 더 광범위하게 다뤄지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여러 신학교, 목회자, 현장 사역자들이 공동으로 문제 제기하고 세계관과 신학을 다루고, 그것을 담은 노래들을 발표하는 현장이 필요하다.

김영범 : 조금 다른 얘기지만, 리띵크워십이 그런 역할들을 하지 않았나. 세미나를 하고. 그게 격월이든 분기든 계속 자주 일어나면서 좀 다양한 논의들이 일어났으면 한다. 음악적 논의든 애가에 대해서든, 이런 부분들이 자주 다뤄지면서 다양한 감상들이 서다 보면 하나의 흐름이 생길 테니까. 그게 자연스럽게 워십인사이트라는 맥락 안에서, 여기서 인터뷰하고 관여했던 사역자들이 한꺼번에 몰려가면서 컨퍼런스화 되는 게 점진적으로 자연스럽고 좋을 거 같다.

김재우 : 워십인사이트 오프라인 미팅 정도면 되는 거 같다. 연속성이나 당위성으로 보면 워십인사이트라는 저널이 있으니까 오프라인이 또 컨텐츠가 되고, 이게 활성화될 수 있는 건 월간이라는 개념이 있으니까 이 자체가 이슈화될 수 있다. 워십인사이트에서 인터뷰했던 분들, 컬럼을 쓰셨던 분들의 이런 이야기만 사실 잘 담는 오프라인 모임만 있어도 상당히 근접하다.

[향후 과제들]

이대귀 : 그리스도의 교회는 쇠하지 않고, 하나님나라가 커져가며,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일하실 것은 기대하고 소망하지만, 한국 기독교의 종교성은 여러 지표들을 통해 봤을 때 하향곡선을 멈추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기적적인 부흥을 특별하게 허락하시지 않고는 사람의 지혜와 흐름 가운데서는 어렵다고 본다. 그냥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199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개신교 인구는 800만 정도이고 지금은 그 이하로 정도로 추산한다. 그중 100만 이상이 가나안 성도이고, 대학생들 조사해보면 크리스찬이 몇 퍼센트 안 된다. 그나마 남아있는 메가처치들의 대부분이 서울 중산 보수층만을 대변하는 모양에, 수도권의 여러 교회 상황들까지 보노라면, 교회가 복음의 건전성과 순수성, 급진성을 담아내고 있는지 우려된다. 이미 모두가 체감하는 문제다. 거의 껍데기와 구호만 남아 있는 한국 기독교라는 거다.

이제는 오히려 1세기처럼, ‘건물이나 소속단체로서의 교회’를 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기의 공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출현할 것이라고 직감한다. 100만의 가나안 성도도 그중 일부다. 그래서 ‘교회를 새로 세우자’라는 운동보다 ‘창의적이고 다양한 예배모임을 새로 많이 만들자’가 더 필요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예배 안의 컨텐츠는 요즘 워낙 모든 단체들이 ‘삶과 예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므로 이런 부분을 단체 내에서 공급하는 거다. 그리고 이 단체 자체들이 역동성을 갖는 것, 그리스도의 나라라는 입장에서 봤을 땐 이게 하나의 교회인 거다. 우리가 말하는 로컬 처치의 개념이 해체되고 파편화된 개념이긴 하고, 예전의 파라처치에 대한 논의와 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한국 기독교의 모습들을 보면 우리가 이 현실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 그래야 사는 게 아닌가 싶다. 즉, ‘죽어야 사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김영범 : 구조를 포기하자는 건가?

이대귀 : 아예 새 씨를 뿌리고 새로 밭 갈자는 것이다. 근데 새로 씨를 뿌리는 것이 꼭 목회자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패션(PASSION)’ 같은 걸 한국에서 했다고 하면 그 자체가 기독교적인 파급력을 갖는 모델로 계속 그 일을 하는 거다. 그래서 거기 모인 회중이 자기의 부르심 따라 공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고 정직하고 하나님나라를 일궈가면서 그냥 사는 구조로 가야 하지 않겠나 싶다.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교회의 껍데기 자체를 계속 갱신한다던지 한기총∙신학교 개혁이던지 그쪽에서 갱신이 될 부분은 하라고 하고, 문제의식을 느낀 다음 세대는 이 시대에 맞는 활용과 옷으로 사역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 세대가 수직 구조의 리더십 구조는 거부하지 않나. 소통과 대화가 중요한 시대다. 이런 구조들로 예배 모델을 특별하게 많이 만드는 실험을 하고, 그중에 하나가 잘 됨으로써 다른 것들이 훅 딸려 가는 식의 갱신이 어떤가 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래서 오히려 패션 같은, 또 그 이상의 컨퍼런스를 해서 어노인팅, 마커스 등등의 단체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이니셔티브를 가지고 하나님 위해서 같이 한번 해 보면 어떨는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그 일들을 하고, 거기 있는 메시지들은 우리가 느끼는 공의∙정의의 문제, 생명의 문제, 이웃 사랑에 대한 문제, 문화 예술에 대한 것들을 녹여내는 거다. 그런 걸 꾸준하게 파일럿으로, 예를 들어 2박 3일 캠프든 뭐든 해 보면 어떤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거다.

김영범 : 프레임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 미국 내에서도 이런 무브먼트로 시작한 곳들이 결국엔 로컬 처치로 전환하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내 생각엔 지역을 기반으로 한 교회 내에서 가족 단위로 교제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대귀 : 거국적, 수만 명의 집결이라 해도 힘을 받는 것이 큰 목적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 중에 일시적인, 아주 작은 일부 기능일 뿐이다. 작은 워십심포지엄이라도 열어서 아카이브가 존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해야 될 목소리를 규칙적으로 낼 수 있는 소통의 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새로운 세대가 한국교회 범주 안에 있으면서도 다른 목소리를 파격적인 틀로 던지는 시도가 생겨날 필요가 있다.

전은주 : 여태껏 얘기를 들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우선 하나는 다음 세대가 원하는 걸 해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정작 이전 세대의 스펙트럼으로 이야기를 안 하고 있지 않은가. 지역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느끼는 건데 정작 다음 세대가 더 갈망하는 것은 친밀함과 공동체이다. 연대나 프로젝트는 밖에서 볼 때 기존에 하던 것과 과연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물을법하다.

또 하나는, 어린 세대들과 같이 있으면 내가 말을 많이 한다. 내 생각을 주입하기 마련이다. 최근에 애들 데리고 함께 놀기 시작하니까 그때부터 본인들 생각이 나오더라. 어떤 부분들은 더 탁월하고 창의적이고 좋은 생각들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공동체적이고 관계적이기도 하다. 물론 어느 정도 가이드가 필요하겠지만, 과연 리드하는 사람들이 다음 세대에게 말할 공간을 주고 들어줄 마음이 있는가도 중요하다. 한국 문화 자체가 나이 많은 사람을 들어야 하는 배경 안에서, 강요가 아닌 소통이 가능하겠는가 물음표를 던진다.

김영범 : 서로를 받아들이는 포용의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음악을 통해서 사람을 엮는 것, 통일성과 다양성을 이뤄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 아닌가. 크고 작은 만남들 가운데서 권력, 세력화되지 않고 서로 친구가 되는 것이 좋겠다. 만약 컨퍼런스를 한다면, 건강한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나와 다른 진영에 있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어야 할 것이다. ‘예배는 삶’이라는 측면을 대중적으로 만날 수 있게 장을 마련하고 맛을 보게 해주자.

이대귀 : 내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진정한 회심이다. 진짜 복음을 소유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나님 중심의 삶이 우리의 삶과 제도와 여러 가지를 바꿀 수밖에 없는 굉장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예배 현장에서 풀어내는 거다. 개신교의 어떤 진영이든 녹여내서 찬양, 기도, 신유 다 열어놓지만, 메시지로는 예수님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던져주는 거다. 그리고 원탁 자리에서는 자기의 삶에 대해서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각 세션마다 메신저들이 그런 걸 던져주는 거다. 예배에서는 인도자들이 그런 걸 소화한 사람들이 하고, 청년들이 도전할 수 있는 세팅을 마련한다든지 등등 이런 건 방법적인 면인 것 같다. 성숙과 성장을 돕고 싶어하는 이들이 오도록 하되, 다양성은 존재하도록 만드는 세팅이다. 답보상태인 10년 20년의 예배 아젠다를 끌어올리다 보면 깊어질수록, 현실의 상황을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존 목회자 기반으로 가는 건 쉽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걸 무명용사들이 해내고, 이런 움직임에 대해 현상학적으로 분석하게 만드는 것이 좋은 방향인 것 같다.

김재우 : 규모와 상관없이 다양성을 허용하는 젊은 사역자들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허나 그 문화가 쉽진 않을 것이다. 우리 다음 세대에게는 가능할 텐데, 단, 긴장의 빗장을 풀어줄 필요가 있다. 로잔 워십 심포지움 같은 원탁문화는 외국 문화에선 되지만 지금의 한국에선 안 된다. 다양한 아젠다를 비판 없이 수렴해 줄 안전한 원탁이 필요하다.

이대귀 : 여러 다양한 의견들을 두루 나누는 가운데, 여전히 숙제가 많고 그 책임을 누가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에 대한 의문이 많다. 하지만 오늘 대화를 독자들이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할 뿐 아니라 해결을 위한 동력의 씨앗으로 뿌려졌기를 기대해본다. 다시 한 번 속 깊은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나눠주신 세 분께 감사드린다. 선교한국 대회에서의 활약을 또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