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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가사를 바꾸는 발칙한 상상력 _이대귀

좋은 곡이 무척 많다. 그럼에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총체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최근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야기는 '애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예배에 슬픔과 애통함을 담은 곡이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는 많은 데 비하여 그와 같은 곡은 많이 소개되지 않는 듯하다.

그 같은 곡이 있더라도 예배인도자들이 전체 흐름을 고려하다 보면 선곡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데 있다. 일차적으로 이런 논의가 시작된 지 오래되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또한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이 그 같은 곡을 많이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예배인도자들과 교회가 그 곡을 수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부재하다. 그것은 설교가나 교회 지도자들의 철학, 회중의 분위기와 종합적으로 빚어내야 하는 것이기에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좋은 곡을 선용하는 방법은 어떨까. 바로 가사를 지역교회와 상황에 맞게 때마다 바꾸어 부르는 방법을 제안해본다. 물론 작사가 혹 번역가는 당장 언짢을 수 있다. 하지만 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변형하여 적용할 부분이 있다면 각 교회가 창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우리가 허용할 수 있지 않을까.

본인의 실례를 들어보겠다. 언젠가 찬송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의 경우, 보통 봉헌송으로만 제한되어 부르는 것이 안타까워 후렴 부분의 영어 가사인 ‘I surrender all’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라는 후렴 부분을 “엎드립니다 엎드립니다”로 바꿔 부르는 모험을 감행해봤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찬송가의 5절 가사쯤으로 여긴 사람도 있었고 그 변화에 전혀 적응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예배에 참여한 어떤 이들에게는 좀 더 선명한 고백을 할 기회를 제공한 것은 분명했다.
예배인도에서 음악적 세련미와 더불어 발전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한국교회 상황 가운데서 ‘가사’의 참신한 변화와 적용이 한 부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래 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노래하는 이들로 하여금 더 선명한 신학적 이해와 바른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둘째, 개인 혹은 회중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돕는다. 셋째, 습관적으로 노래하다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던 영역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신학적 이해를 돕는 가사 바꿔 부르기

회중찬양에서 가사 바꿔 부르기는 신학적 이해를 돕는다. 우리가 하기 가장 쉬운 ‘바꿔 부르기’ 중에 하나는 ‘나’를 ‘우리’로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란 곡에서 ‘나’ 대신 ‘우리’를 넣는 것이다. 홀로 예배할 때 ‘나’로 고백하는 것은 얼마든지 자연스럽고 가능하다. 그러나 회중찬양의 경우 ‘우리’로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로 고백하는 것은 내재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고백의 차원을 하나님나라 백성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좋은 방편이다. ‘너는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라는 축복송의 가사도 ‘너희’로 바꾸어 불러보고 인도해 볼 수 있다. 베드로전서의 원 의미도 모두 복수였던 것을 기억한다면 좋은 시도가 아닐까 싶다. 또한 원 가사 중에 있는 ‘우리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라는 문맥과도 상통한다.

찬양에 있어서 여러 가지 신학적 쟁점들이 있을 수 있는데 찬양인도자를 포함하여 예배자들이 주지할 점을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정도만 언급해본다. 첫째는 ‘오소서’라는 표현이다. 대표적으로 ‘예수 우리 왕이여’란 곡에서 볼 수 있듯, 찬양 중 성령의 충만을 고대하면서 ‘이곳에 오소서’란 고백을 할 때 예배를 인도하는 자가 ‘임마누엘’의 개념이 부족하다면, 성령을 하나의 ‘기운’, ‘에너지’로 축소하고 도구화할 위험이 있다. 하나의 시적 허용으로 볼 수도 있고 갈급한 상황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오소서’란 표현은 우리 공동체 또는 한국교회의 절박한 상황에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긴급히 역사하시기를 탄원하는 뜻으로 이해하는 게 적절하다. 골방에서 만나는 하나님께 ‘오소서’라 하는 것을 그 누가 막으랴. 다만 기복주의적이고 내재주의적인 관점에서 ‘오소서’를 남용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둘째는 필자도 계속 씨름하고 있는 부분인데 바로 ‘씻어 주소서’라는 표현이다. 찬송가에는 주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기를 원하네’, ‘정결하게 하는 샘이… 죄 씻으라 하시네’ 등이다. 여러 의견의 차이가 있겠지만 주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덮는다’는 것이 좀 더 명확한 일차적 표현이 아닐까.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는 것을 생각할 때 ‘씻는다’는 표현은 과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씻는다는 상징성이 굉장히 압도적이고 선명한 비유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칭의나 성화의 차원에서 신학자들의 의견에도 귀 기울여야겠고, 회중에게 목회자들이 좋은 가이드라인을 많이 주면 좋을 것이다. 본인은 두 가지 의미가 다소 섞인 고백을 노래로 표현한 경험이 있다.

은혜 없인 오늘도 나는 죄인이네 죄 없는 듯 살아도
생명의 양식 되신 예수여 주리고 목마른 나를 지금 먹이소서
나를 위한 십자가 대신 지신 예수 내가 찬양합니다
자신을 버리기까지 내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보이셨네
당신께 나의 마음을 쏟아놓고 엎드려 두 손 들고 죄를 고하니
흰 눈 보다 희게 양털보다 희게 나를 깨끗하게 하소서…
예수 생명의 양식 _이대귀 사, 곡

기도를 돕는 가사 바꿔 부르기

계속해서 여러 가능성을 살펴보자.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란 곡이 있다.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이 곡은 멜로디 라인도 매우 수려하고 가사도 좋다. ‘내 안에 선한 것 없다’는 진실한 고백은 무척 귀하다. 그런데 이 고백의 무게가 끝나기도 전에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란 고백이 너무 빨리 나와서 아쉽다. 한 공동체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사를 바꿔 부른 실례가 있다.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내게 긍휼 베푸시어 주님 위해 살 수 있게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긍휼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긍휼 내게 주소서 이 땅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긍휼 내게 주소서’

이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하나의 시도를 소개하는 것뿐이지 이것을 표준화하려는 의도는 없음을 분명히 한다. 다만 회중이 더욱 자신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나가도록 돕는 것은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란 고백이 뭐 그리 나쁘겠는가. 그러나 ‘이 땅 향하신 주님의 뜻’이라고 고백할 때 아버지께서 더 기뻐하실 것 같다. 더 정직하고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함께 애쓸 수 있는 예이다.

새로운 전환으로서의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습관적으로 노래하는 자로 하여금 전혀 인식하지 못하던 영역에 지평을 열어준다는 것은, 서두에 언급한 ‘내게 있는 모든 것을’과 같은 경우이다. 헌금할 때만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 곡이 실은 주께 순복하는 자의 진실한 고백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대표적인 예로, 황병구가 개사한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경우를 보자. 보통 축복송으로 대표되어 파송을 받는 사람, 생일 맞은 사람, 자존감이 낮은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불러주는 이 곡을 ‘당신을 고난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바꿔 부를 때 다수는 황당함, 궁금함, 의아함을 경험하지만 곡이 끝날 무렵 새롭고 신선한 자극을 받는다. 부르는 동시에 자신들이 불렀던 ‘사랑’의 본질이 얼마나 옅은 것인가를 체감하는 것이다. 본인은 초대를 받아 예배인도를 하거나 곡을 발표하는 장소에서 회중과 접점을 마련하고자 이 곡을 곧잘 사용하는데 그때마다 입에 익은 ‘사랑’이란 단어가 ‘고난’ 대목에서 계속 튀어나올 때 모종의 희열을 느낀다. 고난이 사랑이고, 사랑이 고난인 역설 속 진리가 회중찬양 가운데 드러나기 때문이다.

당신은 고난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태초부터 계획된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헌신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을 거슬러 감으로 인해 우리에겐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지
개사_황병구

창조적 가사 바꿔 부르기는 신선함을 준다. 그러나 이 또한 노래 가사를 바꾸는 이가 깊이 묵상하고 숙고하고 점검하여 조심스레 해야 하고, 공동체적 공감을 이뤄가야 하는 숙제가 있다. 섣부른 시도는 저항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예배를 인도하거나 어떤 팀에 관계된 분들이 계시다면 창조적인 가사 바꿔 부르기를 통하여 적극적인 노력들을 함께 기울여보기를 제안한다. 대안으로서의 노력보다는 자연스런 흐름과 공동체의 절박한 필요 가운데 이와 같은 작은 운동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우리의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다. 한국교회 현실도 큰 진전 없고 한국사회도 여러 면에서 암울한 뉴스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회중과 더불어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이대귀
CCM 아티스트
찬양집 많은물소리 공동편집인
킹덤스테이션 책임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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