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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따라걷기 #03] 예루살렘과 그 주변 : 베데스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요 5:2-4)

‘(연)못’이라고 하면 금붕어와 잉어 떼가 헤엄치고, 연잎이 둥둥 떠다니는 그림을 상상하겠지만, 성경에 나오는 베데스다 못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못”이라고 번역하기는 했어도, 사실 베데스다는 물 저장고였습니다. 물 저장고 중 일부는 야외에 노출된 곳도 있었고, 또 건물 아래, 실내에 있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는 대규모의 물 저장고들이 꽤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성전 제의(祭儀)에 사용되는 물을 보관하기 위해서 성전 마당 아래에 만들어놓은 물 저장고를 들 수 있겠고, 그다음 단일 시설을 위한 물 저장고로 큰 것이 아마 베데스다였을 겁니다.

베데스다의 용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정결례(淨潔禮)를 하던 곳이었다는 것과 예수님 당시 병원 밀집 지역에서 입원한 환자들의 수술과 치료에 사용될 깨끗한 물을 저장하던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caption id="attachment_80578" align="alignnone" width="824"] 베데스다 물 저장고 : 밖으로 드러난 베데스다의 물 저장고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기원전 3세기부터 사용되던 것이다. 이 물 저장고의 동쪽 편 건물들은 예수님 당시의 건물들이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물 저장고 주변에서 38년 동안 앓아왔던 병자를 만나셨을 것이다.[/caption]

우리말 성경에서는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에서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만나셨다고 말하는데, 아마 이것은 “히브리말”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원어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도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생긴 번역상의 혼동인 것 같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아람어로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거든요. 환자들을긍휼히 여기며 그들에게 자애로운 마음으로 육체의 질병뿐 아니라, 마음까지 보듬을 수 있는 곳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자비의 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미쉬나 기록에 의하면, 이 베데스다는 로마의 신을 위한 장소라고 말하거든요. 그리스-로마 신화에 에스클리피우스(Asclepius)라는 신이 나오는데, 이 신은 약(藥)의 신이면서 동시에 의술의 신이기도 합니다.

병원에서 흔히 보는 그림 중에 하나인, 뱀이 지팡이를 뱅뱅 돌아 꼬며 올라가 있는 그 지팡이가 바로 에스클리피우스의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이 에스클리피우스 신상의 일부를 베데스다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병자들이 바랐던 ‘자비’는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에스클리피우스의 자비’였을지도 모릅니다.

[caption id="attachment_80579" align="alignright" width="442"] 에스클리피우스 :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의술의 신으로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다. 이 지팡이에는 뱀 한 마리가 있는데, 에스클리피우스의 지팡이는 의료용품이나 기기에 “치료”의 상징으로 새겨져 있다. 때로는 뱀 두 마리가 날개 달린 지팡이와 함께 있기도 한데 그것은 헤르메스의 지팡이로, 에스클리피우스의 지팡이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헤르메스의 지팡이 역시 이제는 일반화된 “치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caption]

예수님은 베데스다에서 38년 동안 고통을 간직한 채 낫고자 하는 열망으로 물 곁에 앉아 있던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병자가 예수님을 기다렸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기다렸던 것이 하나님의 천사라고 딱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말 성경 요한복음 5장 3,4절에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라고 기록되었는데, 대괄호로 묶여 있는 이 이야기는 로마의 신화입니다!

‘천사’라는 표현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천사를 하나님의 천사로 오해하지만, 그리스어로 ‘천사’ 라는 말, ‘앙겔로스’는 “소식을 전하는 자”를 뜻하는 말로 메시지를 전하는 신적인 존재나 사람 누구라도 가리킬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우스의 메시지를 사람에게 전하는 에스클리피우스 역시, 굳이 그리스어로 표현하자면, ‘앙겔로스’가 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사람이 기다렸던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물을 움직이고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에스클리피우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데스다의 중앙이나 어느 한쪽에 세워져 있었을 에스클리피우스의 석상을 바라보면서 그 돌덩어리가 내려와 물을 움직여주기를 기다리는 그 사람을 보신 예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던 예루살렘, 그것도 바로 성전 옆에서 말입니다.

게다가 자기가 내려갈 때 혹시 다른 사람이 내려갈까 봐 노심초사하는 그 이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38년 된 병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베데스다 연못가에 앉아 그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에게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낫고자 하는 그 간절함은 아마 처음 발병해서 다리를 쓰지 못했을 때부터 예수님과 대화하는 순간까지도 지극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간절함이 있다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간절함을 이루고자 애달프게 바라보는 그 석상, 그 신화! 바라보고 있는 곳이 영 엉뚱하니 그 간절함이 이루어질리 만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간절함이 그를 낫게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낫게 된 이유는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간절함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남들이 도무지 상상하지도 못하는 애절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간곡한 간절함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간절함이 성공 ‘신화’를 좇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예수님이 계셔야 하거든요. 헛된 신화를 좇던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계신가요?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을 기다리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