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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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감독의 ‘터널’-생명논리를 되살리는 블랙코미디

이번 여름은 공포대신 재난영화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에 이어서 김성훈 감독의 <터널>이 2016년 여름의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었다. <부산행>은 관객수 천백만을 훌쩍 뛰어넘어 모든 제작자가 소원하는 천만 영화에 그 이름을 올렸고, <터널> 또한 개봉 열흘 만에 4백만 관객을 모으는 바람에 6백5십만 명을 넘어선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을 식혀준 흥행트로이카 대열을 이루었다. <터널>은 <부산행>과 더불어 장르상 재난영화에 속한다.

<부산행>은 원인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순식간에 좀비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태운 부산행 KTX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혈투가 관객의 시선을 모았다면, <터널>은 무너진 터널 속에 갇힌 한 남자의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孤軍奮鬪)를 담았다. <부산행>에서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직접적 위험요소로 좀비를 내세웠다면, <터널>은 언제 어떻게 떨어질지 모르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사람들을 물어뜯기 위해 빠른 속도로 뒤쫓는 좀비와 주인공의 자동차 앞뒤로 사정없이 무너져 내리는 바위덩어리는 각 영화에서 공포효과를 극대화시키며 주인공이 처한 위기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할 수 있는지를 인식시킨다.

그러나 <터널>에 등장한 또 하나의 공포는 터널 밖 구조현장에서 일어난다. 즉 무너진 바위 밑에 깔린 주인공의 생사결정은 더 이상 바위 자체에 달려있지 않다. 생사를 모르는 상황에서 얼마나 구조작업을 지속하느냐의 문제는 구조대와 정부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다.

<터널>과 <부산행>같은 재난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은 결코 현실과 동떨어져있지 않다. 즉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비록 영화의 내용이 허구에 불과하지만 현실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다. 비록 좀비가 되는 바이러스는 존재하지 않지만 지난해 메르스 사태와 같이 접촉에 의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생명을 위협한 일은 이미 우리가 경험한 현실이었다.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사고는 지금까지 295명의 희생자와 9명의 실종자를 기록하며 여전히 우리의 삶 한편에서 수습 중에 있다.

그런데 두 편의 재난영화는 모두 그 원인이 사람 일으킨 인재(人災)란데서 출발한다. <부산행>에 등장하는 증권사직원은 자신이 작전(주가조작)으로 키워놓은 한 바이오공장에서 유출된 바이러스가 좀비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죄책감에 빠진다. <터널>에서는 완공한지 얼마 되지 않는 터널의 붕괴뿐만 아니라 환풍기 개수를 적어 넣은 설계도와 다르게 시공되는 바람에 터널 속에 갇힌 주인공을 구출하는데 헛수고를 하게 되는 모습은 현실 속에서 우리 사회를 공포에 몰아넣는 재난이 결국은 사람이 만든 인재란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결국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의 욕심과 부정이 만들어낸 현실이다.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만으로도 공포에 휩싸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현실이 영화보다 무서운 까닭에 공포를 상업화하려는 영화감독은 단지 우리의 현실을 카메라에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독을 이기는 소통의 힘
영화 <터널>은 자동차 대리점의 세일즈맨이 딸아이의 생일에 집으로 가다 터널이 붕괴되는 바람에 터널 한복판에서 고립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정수(하정우)가 인간 생존 최대기간을 넘기면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낙관적인 마음의 자세도 있지만 그것을 지지해주고 외부의 구조상황을 전달받을 수 있었던 소통의 힘에 있었다. 처음에는 휴대폰으로 정해진 시간마다 구조대와 연락을 취하고, 휴대폰 배터리가 나간 이후에는 자동차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주인공이 비록 답을 할 수 없는 일방적인 방송이지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며 음악을 들려주는 일은 분명 내가 언젠가는 어둠 속 공간에서 벗어나 밝은 빛의 세계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건 버려지는 것이며 잊혀지는 일이다.

고독의 무서움은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식의 고립으로부터 비롯된다. 서양 수도원의 출발점이 되었던 사막의 수도자들은 모래와 바람만이 존재하는 불모지에서 기도와 말씀만의 생활로도 바쁘고 기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고립의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나 또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사막의 수도자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의 상황에서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의 목숨을 해치려는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소통의 단절을 느낄 때였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쉬운 까닭이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살전 5:14)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그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은 누군가를 살리는 힘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공동체
그러나 영화 <터널>이 지니는 가장 큰 성경적 가치는 생명 중심의 사고를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지역 사회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무너진 터널 옆으로 또 다른 터널을 뚫기 위해 폭약을 발파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분노하는 한편으로 경제논리를 펴는 현실사회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숨길 수 없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수고와 희생 그리고 경제적 손실이 있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수 없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기독교문화가 살아 있는 사회의 특징은 절대적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약자중심의 논리를 거부하지 않는 데 있다.

강진구
고신대학교 국제문화선교학부교수. 영화평론가. 서강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저서《감성세대 여화읽기》이메일 moviejin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