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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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정 감독의 대호

잃어버린 ‘조선의 호랑이’를 살리는 의미는 ‘1917년 12월 20일, 도쿄제국호텔 연회장에서는 일본 유명인사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의 식재료로 만든 진귀한 요리들이 제공되었다. 이 날의 메인 요리는 토마토소스를 곁들인 함경남도 호랑이의 차가운 고기였다’(EBS 역사채널e, 2014년 6월 19일 방송).

이 호랑이를 포획한 사람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라는 일본의 거부로, 그는 조선 팔도의 유명한 포수들을 모아 정호군(征虎軍)을 창설하고 조선의 호랑이 사냥에 나섰던 인물이다.

그가 엄청난 돈을 들여 조선 호랑이의 씨를 말리려 한 것은 단순히 일본에서 사냥할 호랑이가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본인의 담력과 기개를 높이는 한편 조선을 정벌하는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적 의미가 있음은 물론이다.

조선인에게 호랑이는 영물(靈物)이었고 신화와 설화를 통해 조선 역사에 존재했던 까닭에, 조선 호랑이 사냥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정치적 속내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다사부로가 호랑이 사냥을 끝내고 쓴 《정호기》(征虎記)를 보면 실제 그가 포획한 호랑이는 단 두 마리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냥에는 조선의 포수들이 동원되었다.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행한 그의 사냥 이후 얼마 못가서 조선의 호랑이가 자취를 감췄다는 점에서 ‘조선’과 ‘호랑이’는 동의어로 읽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훈정 감독의 <대호>(大虎)는 다다사부로의 《정호기》를 참고로 만든 보기 드문 호랑이 사냥 영화다. 환경보호가 시대의 대세인 오늘날 야생동물 사냥은 현실적으로도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시행되는 까닭에, 총기를 사용한 근대적 수렵은 영화 소재로 삼기가 어려웠다. 특히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춘 호랑이 사냥에 대한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긴다는 생각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두 가지의 특별한 상황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거대한 호랑이를 재현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동적인 움직임을 가능하게 만든 디지털기술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한민족의 문화코드인 호랑이가 지닌 상징적 의미가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중국의 판다, 영국의 사자 그리고 미국의 흰머리독수리(Bald Eagle)가 각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 동물이듯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동물은 바로 호랑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빛낸 마스코트가 호랑이를 캐릭터로 만든 ‘호돌이’(Hodori)가 아니었던가!

명포수와 운명을 같이 한 호랑이
<대호>는 명포수 천만덕(최민식)과 조선 마지막 호랑이 ‘대호’의 만남과 최후를 처연하게 묘사한다. 표면적으로는 포수와 사냥감의 쫓고 쫓기는 단순한 사냥 영화지만 이것을 깊이 있는 생각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 배경이 일제강점기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고관 마에조노(오스기 렌)는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대호’를 손에 넣기 위해 일본군과 조선 포수대를 지리산 사냥에 투입시킨다. 그러나 대호의 영민함과 무서운 힘에 오히려 일본군은 처참히 희생당한다. 이제 대호를 잡을 수 있는 인물은 천만덕 외에 남아 있지 않다. 대호와 일본군과의 대결 구도가 끝나면 영화는 곧바로 천만덕과 대호와의 숙명적이고 설화적인 이야기로 급반전된다.

이 때 만덕과 대호는 마치 거울을 마주하는 듯 동일 인물처럼 묘사되고 있다. 만덕과 대호는 서로의 가족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본인인 동시에 서로에게는 한없는 예를 갖추며 교감하는 대상이다.

우리는 만덕의 아들 석(성유빈)이 늑대 무리에게 끌려가 먹이가 되기 직전, 대호가 구해다가 만덕의 집 앞에 석을 갖다놓는 장면에서 ‘은혜 갚는 짐승’에 대한 한국의 전래동화를 읽는 착각을 하게 된다.

깊은 상처를 입은 대호가 만덕에게 죽고 싶다는 눈짓을 보내고, 만덕은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기 전 대호에게 큰 절을 한다. 대호가 ‘산의 임금’을 뜻하는 산군(山君)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를 이해시키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과의 관계
박훈정 감독은 한 신문 인터뷰에서 <대호>의 메시지를 간략하게 언급한 일이 있었다.
“자연과 사람이 서로 존중하며 공존했고 예의를 지켰던 시대는 일제로 대변되는 욕망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종말을 맞는다.”

이 말은 환경이 중요한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자연을 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성찰로 인도한다. 산신에게 기도하거나 대호와 같이 위협적인 자연에 대한 숭배를 떠올리는 것은 옳지 않다.

우상숭배는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영역 어디에서나 있는 까닭에, 산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산이나 짐승과 연관된 우상에 주의해야 한다. 그 대신 <대호>를 통해 하나님나라에서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공감과 공존의 의미를 떠올릴 수 있다면 대단히 유익하다.

성경적 관점에서 인간과 자연의 대결구도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하나님께 지은 죄의 결과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인간이 지은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자연 사이도 틀어놓았다. 자연을 가꾸고 돌보는 청지기적인 시각(창 1:28)은 사라지고 욕심이 죄성을 부추기는 바람에, 인간은 자연 앞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갖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롬 6:23).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사 11:6).

강진구
고신대학교 국제문화선교학부교수. 영화평론가. 서강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저서《감성세대 여화읽기》이메일 moviejin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