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갓피플매거진

콜린 트레보로우 감독의 ‘쥬라기 월드’

통제되지 않는 공룡으로 돌아오다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이 개봉되었을 당시 우리 모두는 탄성과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하버드 의대 출신의 작가인 마이클 크라이튼 (Michael Crichton) 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 했다고는 하지만 지구상에서 멸종한 공룡들을 이토록 생생하게 살려놓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는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영화의 줄거리를 가능하게 만드는 최첨단 유전공학기술에 대해 경악했고, 사라진 공룡을 스크린에 살려놓는 영화의 특수효과기술에 다시 한 번 놀랐던 것이다.

공룡의 피를 빨아먹고는 소화시키지 못한 채 호박 (琥珀)속에 갇혀있던 모기 위에서 공룡의 DNA를 추출하여 공룡을 부활시킨다는 설정은 비록 과장되었지만 유전공학의 발달 속도를 볼 때 곧 현실화될 수 있는 기술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세계교회들 사이에서 인간이 생명을 마음대로 창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위치에 오른 것이 아니냐는 논쟁을 일으켰고, 인간복제에 대한 기독교세계관적 토론을 곳곳에서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조지 루카스 (George Lucas)가 설립한 특수효과전문회사인 ILM(Industrial Light & Magic) 에 의해 그림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갖가지 공룡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한국영화에서 공룡을 보는 수준이란 고작 심형래 감독이 같은 해 여름방학용으로 제작한 <영구와 공룡 쮸쮸> (1993)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이 비어 있는 커다란 공룡 모양의 고무인형 속에 사람이 들어가 움직이는 것과 슈퍼컴퓨터를 통해 공룡 눈알의 실핏줄까지도 섬세하게 묘사해놓은 할리우드 영화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게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22년의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쥬라기 월드>(Jurassic World)로 돌아왔다. 부모의 이혼을 앞두고 어린 형제 그레이와 자크는 이모가 매니저로 근무하는 지상 최대의 테마파크 ‘쥬라기 월드’로 놀러간다.

‘쥬라기 월드’는 공룡을 보는 안목이 높아진 전 세계의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더 크고 더 무서우며 더 센 공룡들을 유전자 조합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 결과 탄생한 공룡이 ‘인도미누스 렉스’(Indominus rex). 인도미누스 렉스는 티라노사우루스를 비롯하여 벨로키랍토르와 같은 무서운 공룡들의 유전자는 물론 개구리나 오징어의 유전까지도 조합하여 머리가 뛰어난 것은 물론 자기를 보호하고 남을 공격 능력까지 탁월한 무적의 공룡으로 태어난다. 영화는 지난 세 편의 전작들에서 보여준 것과 다름없이 예측에 실패한 사람들은 사육장을 탈출한 인도미누스 렉스로부터 무차별한 살상을 당한다.

누구나 미리 알 수 있는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한층 발전된 시각효과는 <쥬라기 공원>을 보지 못한 세대에게는 나름대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이미 본 세대에게는 옛날의 추억을 회상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역시 <쥬라기 월드>의 철학적 의미는 자연을 통제하여 돈을 벌고 전쟁터의 생물무기로 활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가져온 파멸을 지켜보는 데 있다.

인간은 시간을 통제하여 과거에 살았던 공룡을 현재화 시키는 것도 모자라, 피자 위에 토핑 얹듯 원하는 모양과 성격의 공룡을 만들어 상업적 혹은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할 생각에 몰두해 있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공룡이 생명을 지닌 생물이란 점에서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대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영화 속 공룡이 상징하는 자연과 시간을 마음대로 지배하려는 순간부터 인간은 파멸의 길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문화명령’에 해당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말씀은 자연에 대한 통제가 아니라 잘 가꾸고 지키는 청지기의 역할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윗의 인구조사가 주는 교훈을 기억하라

성경에서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통제 (Control)하려는 행동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동으로 이해되었다. 사무엘하 24장과 역대상 21장에는 다윗 왕이 요압을 보내어 이스라엘의 인구수를 조사하게 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요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일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왕의 재촉 때문에 할 수 없이 아홉 달 스무날에 걸친 인구조사 결과를 왕에게 보고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인구조사 후 다윗은 곧 자책하며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는 점이다(삼하 24:10).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하여 다윗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세 가지 벌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말씀하셨다. 첫째는 나라에 일곱 해 동안 흉년이 들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왕이 자기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을 피하여 석 달 동안 도망을 다녀야 하는 일이며, 셋째는 온 나라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퍼지는 벌이었다. 다윗은 세 번째 벌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기간이 가장 짧을 뿐 만 아니라 전염병은 하나님이 직접 내리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즉시라도 멈출 수 있다고 다윗은 생각한 것 같다.

이 사건의 가장 핵심은 도대체 인구조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것인지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스라엘에서 인구조사는 백성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한을 의심하고 침해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고(창 12:2), 땅의 티끌처럼 자손이 셀 수 없이 많도록 해주시겠다고 거듭 약속하셨다(창 13:16).

그런데 인구조사란 과연 하나님이 약속대로 하셨는지를 의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해보려는 불손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요압이 다윗에게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삼하 24:9)라고 보고한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전쟁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싸움이 아니라 숫자와 인간적인 전략을 따르는 싸움으로 생각하게 하는 일인 까닭에 하나님이 싫어하셨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통치자가 행하는 인구조사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이 자기 주도적으로 세상을 통제하려는 잘못된 행동으로 파악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대하는 방법은 통제가 아니라 좋은 관계를 맺는 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