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갓피플매거진

<신은 죽지 않았다>(God’s Not Dead)

무신론의 강의실에 던져진 고독한 그리스도인
미셸 푸코, 버트란드 러셀, 루트비히 포이에르 바흐, 베로톨트 브레히트, 프리드리히 니체, 아인 랜드, 조지 산타야냐, 데모크리토스, 드니 디드로, 데이빗 흄, 존 스튜어트 밀, 알베르 까뮈, 지그문드 프로이트, 노암 촘스키….

대학의 필수과정인 철학입문을 강의하는 제프리 래디슨(케빈 소보) 교수가 수업 첫 시간에 칠판 가득 위와 같은 이름들을 써내려간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서구역사의 유명 한 학자나 소설가들의 이름이다.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게 아니다. 노암 촘스키는 아직도 건재하니 말이다.

공통점은 모두 무신론자들이라는 것. 이성을 논하는 철학 강의에서 래디슨 교수는 신입생들에게 종이를 나눠주며 ‘신은 죽었다’(God is Dead) 라고 쓰고 서명할 것을 종용한다. 이 과목이 학생들의 진로에 중요함을 상기시키면서….

2014년 봄, 미국에서 개봉되어 기독교영화로는 드물게 전미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4주간이나 이름을 올렸던 영화 <신은 죽지 않았다>는 무신론자로 살아가도록 종용을 받는 대학사회의 현실을 풍자한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인의 삶의 가치를 북돋우는 흥미로운 영화임에 분명하다.

특히 전통적인 기독교영화가 추구하는 ‘현실의 갈등과 신앙 안에서의 해결’이란 구도를 따르면서도 갈등의 진원지를 대학 강의실로 설정하는 까닭에, 기독교영화란 재미없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젊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대학 신입생 ‘조쉬 휘튼’(쉐인 하퍼)은 래디슨 교수의 반강제적인 제안을 뿌리치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일처럼 가능하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하며 래디슨 교수에게 맞선다. 주인공 조쉬 휘튼의 고난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래디슨 교수는 휘튼에게 3주 동안 발언할 기회를 제공하는 대신 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을 명령조로 제안한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대중영화에 등장하는 고독한 영웅의 구조를 취하기 때문이다. 난관에 봉착한 우리의 영웅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걸어가야 할 길은 험난하기 만 하다. 그가 맞서 싸워야 하는 상대는 철학 전공 교수이며, 그는 결정적으로 학생의 학점을 결정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일이 더 쉬웠을 법한 상황에서, 휘튼의 여자친구는 적당히 타협할 것을 권유하다 마침내 이별을 통보하고 그의 곁을 떠나 버린다. 대학교 신입생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 결코 쉬울 수 없으며,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다 한들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예배하였을 뿐 증명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포기와 타협을 한다고 해서 교수의 말에 순종한 그를 두고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분위기다.

영화는 우리가 주인공의 입장에서 갈등을 체험시키며 궁극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커다란 권력과 이익 앞에서 ‘믿음의 배반’을 종용받을 때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생각하고 도전하도록 만든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강의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 최면에 걸려 ‘사실인 듯 착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닌 까닭에, 하나님의 존재는 삶을 통해 인식되고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래디슨 교수가 “나는 하나님이 싫어” (I hate God!)라고 말했을 때 휘튼이 “하나님이 없다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싫어할 수 있죠?”라고 반문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래디슨 교수의 말의 정확한 뜻은 ‘하나님이 계시지만 난 잘 이해가 안 돼!’에 가깝다.

영화는 왜 래디슨 교수가 그토록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드러낸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고통을 지켜보며 한번쯤 의심해봤을 법한 질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주실까?’라는 질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 지금의 래디슨 교수를 만든 것이다. 이 영화는 하나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에 강조점이 있지 않은 대신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용기와 신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국인 유학생 마틴이 고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로 강의실에서 일어난 신존재 논쟁에 대해서 말했을 때 아버지는 도청당할지 모른다며 아들의 질문을 회피해 버린다. 공산당이 집권하는 중국이기에 가능한 설정으로 가장 코믹한 장면이기도 하다. 무슬림 차림의 여학생 아이샤는 1년 전부터 예수를 믿고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난다.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살아가도록 압력을 받은 영화 속 인물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대목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마지막 명장면을 연상시킨다. 학교를 떠나는 키팅 선생을 지지하는 뜻에서 책상 위에 올라가는 학생들처럼 휘튼의 동료 학우들은 래디슨 교수가 보는 앞에서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우리가 이 영화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신론이 움직이는 대학캠퍼스에서 젊은 기독대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용기’임을 보여주는 까닭이 다. 이 영화가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사이에서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직접 확인해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