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에 의한 하정우를 위한 영화
단칸방에 부부와 어린 세 형제가 잠을 청하고 있다.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아이들을 위해 아버지는 왕만두를 만들기 시작한다.
“자, 고기를 툭 띠어서 비계랑 살코기를 잘게 썬 다음에 거기다 부추랑 파랑 당면을 잘 섞어요. 그럼 그것을 다섯 개 만두피에다가 그리고 찜통 바닥에 행주를 깔고 약한 불로 십분 동안 싹~ 하는 거야. 와우 고기 냄새 난다. 다 됐다. 삼락이 고기 왕만두 대령이요. 자, 이제 침을 삼키면 먹게 되는 거야.”
아버지가 만드는 이 왕만두는 이불 속에서 단지 입으로 말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세 아이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더 만들어달라고 성화다. 다음 날 아버지는 아이들과 아내에게 왕만 두를 사주기 위해 피를 팔러 길을 나선다.
중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위화 (余華)의 소설 ‘허삼관매혈기’(許三觀賣血記)를 영화로 만든 <허삼관>은 피를 팔아서라도 어떻게든 삶을 꾸려나가는 가난한 가장의 부성애를 그린 매우
코믹하고 인간미 넘치는 작품이다. 이미 국내 연극무대와 출판된 소설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영화적 감동을 주는 이유는 연출과 주연을 동시에 맡은 하정우의 독특한 캐릭터 형성 에 있다.
영화 속 주인공 허삼관(하정우)은 말 잘하는 것 외에는 볼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가난한 시대의 정형화된 인물로 등장한다. 미래에 대한 꿈이나 야망 대신 자신에게 닥쳐오는 일들에 대해 하루하루를 대응하면서 살다가 경제적으로 힘에 부치면 궁여지책으로 피를 팔아 위기를 넘기는 극히 소시민적인 삶을 사는 캐릭터다. 감독을 맡은 하정우는 두 가지의 남다른 성격을 이 캐릭터에 불어넣어 특별한 영화로 만들었다.
첫째 주인공의 감정노출을 극도로 절제시켜 관객들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게 아니라 구경꾼의 입장에서 영화 전체를 조망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될 수 있는 한 대사 속에 감정을 싣지 않으려는 허삼관의 말투에서 드러난다. 큰 아들 일락(남다름)이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의 자식임이 드러나는 순간에도 그는 아연실색하거나 분노의 주먹을 휘두르는 일이 없다. 마치 남 얘기 하듯이 자신의 상황을 관객에게 객관적으로 인식시킬 뿐이다.
둘째, 속이 좁은 남성상이 구축된 영화 주인공의 코믹한 캐릭터가 빛을 보기 시작한다. 왕만두가 먹고 싶은 아이들을 위해 피를 팔지만 정작 큰 아들 일락이는 아내가 결혼 전 만난 하소용(민무제)의 자식이란 사실을 떠올리며 할아버지댁에 가서 저녁을 먹게 만든다. 이 때 역시 허삼관은 일락이에게 자신의 팔뚝에 난 피를 뽑은 흔적을 보여주며 일락이가 다른 가족들과 함께 만두를 먹을 수 없는 이유를 조근조근 이야기한다.
“내가 피를 왜 뽑았겠어? 다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야. 그런데 너한테는 만두를 사줄 수가 없어. 너한테 만두를 사주면 내 피를 하소용에게 바치는 것이 되잖아. 그치? 알아들었으면 어서 가. 엄마 앞에서 표정 관리 잘하고.”
11년 동안 종달새(남의 자식인줄 모르고 키웠다는 뜻) 노릇한 것에 대한 복수치고는 치졸하기 그지없지만 허삼관의 이런 찌질이 같은 언행은 하정우의 능청스런 연기와 결합되면서 허삼관이란 캐릭터를 오랫동안 잊지 못하게 만든다.
속이 좁은 남자지만 본성은 착해서 결코 냉혈인간은 절대 못되는 역할을 하정우만큼 소화해 낼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 거기다 ‘먹방 배우’라는 별명답게 음식과 관련해서 그 찌질함이 돋보이는 배역이라면 왜 하정우일 수밖에 없는지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
피와 부성애
<허삼관>의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아버지 허삼관의 매혈 행위에 있다. 돈이 궁할 때마다 매혈로 필요를 충당하지만, 인간에게 피는 생명과 직결된 인간의 조직 가운데 하나란 점에
서(신 12:23) 주인공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즉 허삼관이 피를 팔아 무엇에
쓰려는지 용도를 살펴보면 그 안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 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허삼관이 처음 피를 판 이유는 아내를 얻어 결혼하기 위함이었다. 결혼의 신성성을 발견하는 대목이다. 단지 여자가 예쁘고 좋아서 결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위해 주인공이 피를 파는 행위를 보여주는 일은 결혼이란 행위가 피가 가진 생명성을 교환할 만큼 의미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아내와 자식의 생활을 위해 허삼관은 또 다시 매혈에 나선다. 큰 아들이 자신과 동생을 놀리는 이웃집 아이를 때린 덕분으로 부담스러운 병원비가 청구되자 아내는 자신이 아끼던 살림살이까지 잃게 된다. 실의에 빠진 아내를 위로하고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왕만두를 사주기 위해 허삼관은 피를 뽑는다. 가족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의 가치가 이 안에 담겨 있다.
셋째,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인 매혈의 역할은 병든 자식을 구하는 생명구원에 있다. 비록 자신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그리고 한동안 매정하게 대했던 자식이지만, 막상 큰 아들 일락이가 뇌염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그는 자신의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계속 피를 뽑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병든 아들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치료받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얼굴이 시체처럼 변하도록 피를 파는 아버지의 모습은 사랑이 아니고선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동안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의 자식이라 왕만두 하나 먹이는 것도 거부해왔는데, 그 아들을 위해 자신의 피를 파는 주인공의 모습에는 진한 부성애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피는 돈이 아니라 생명이며 사랑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