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는 조폭으로 통하는가?
바둑은 취미이자 프로 스포츠이며 수학인 동시에 인생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2,500백여 년 전 중국에서 시작된 바둑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서양장기인 체스가 1997년 IBM의 슈퍼컴퓨터 ‘딥 블루’에게 세계챔피언 자리를 내어주면서부터다. 체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두뇌 싸움의 현장인 바둑에서 아직까지 인간을 능가하는 컴퓨터 챔피언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로·세로 19개의 줄로 구성된 바둑판은 361개의 교차점 위에 흰 돌과 검은 돌을 놓아 집을 만드는 일종의 조함게임이다. 어디에 돌을 놓느냐에 따라서 이후에 이루어지는 조합의 수는 엄청나게 많다. 미래의 컴퓨터가 모든 포석의 원리를 계산해서 인간을 이기는 날이 올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바둑은 컴퓨터가 왕 노릇 하지 못하는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바둑이 ‘인간의 세상’이란 뜻은 인간이 지닌 다양한 성격과 상황 그리고 그에 따른 희로애락의 삶의 모습이 투영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즉, 풍부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콘텐츠로써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는 이제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것마저도 조폭들에 의해 점령당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조범구 감독의 <신의 한수>는 내기 바둑으로 인해 조폭으로부터 목숨을 잃은 형의 복수를 위해 바둑과 주먹 양쪽의 실력을 기르는 프로 바둑기사 태석(정우성)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한편 조세래 감독의 데뷔작이자 유작이 되어버린 영화 <스톤>은 프로 기사의 꿈을 접고 내기 바둑으로 살아가는 청년 민수(조동인)가 조폭 두목인 남해(김뢰하)를 만나면서 일어나는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신의 한수>와 <스톤>은 출연 배우들의 이름이 보여주듯 규모에서 차이가 난다.
정우성을 비롯하여 이범수와 김인권 그리고 안성기를 투입한 <신의 한수>는 정적인 바둑의 세계를 역동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내기 바둑으로 한 몫 보는 조폭을 등장시키며, 무협지에 버금가는 각종 기술과 전략, 강한 폭력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마치 화투판의 전설을 담은 <타짜>의 바둑 편을 보는 듯 착각 속에 빠질 수 있다. 바둑의 묘미는 사라지고 주먹만 기억되는 형국이다.
<스톤>도 조폭의 결합을 통해 오락적 기능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신의 한수>와 유사한 접근방법을 따른다. 그러나 작은 영화가 세밀한 심리묘사의 강점을 가지고 있듯 <스톤>은 젊은 바둑 학도와 조폭 두목 사이에서 일어난 우정과 내적인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다 깊은 내면적 울림을 전해준다.
즉 민수는 더 이상 내기바둑을 두는 인생으로부터 벗어나 프로 기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는가 하면 남해는 민수로부터 바둑을 배우면서 주먹 쓰는 일에 흥미를 잃고 민수를 뒷바라지 해주다 끝내 보스의 자리마저 내주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바둑인 인생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분명 <스톤>은 바둑인들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영화로 인식될 수 있다.
바둑의 묘미를 살려야 함이 옳다
‘조폭영화’란 말은 한국에서만 쓰는 독특한 장르용어로써 뒷골목 범죄 집단의 모습을 다룬 서양의 느와르(Noir)나 갱스터 무비와는 분명 성격을 달리한다. 단순한 범죄 집단의 행위를 흥미롭게 구성하는 것 외에도 조직 내외에서 일어난 의리와 배신, 권력 지향적 인간의 탐욕과 멸망이라는 사회윤리적가치관이 내재해 있는가 하면, 인간애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도 한국의 조폭영화가 가지는 특징이다.
그러나 조폭영화가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며 지난 십여 년간 지속적으로 제작된 일은 사회심리적관점으로 볼 때 바람직하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조폭영화와 같은 느와르 계열의 영화가 꾸준히 제작되는 동시에 흥행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불안의 정서가 작용했다는 의미로 읽혀질 수 있다.
할리우드의 경우 대공황을 겪으면서 알 카포네로 대변되는 범죄자의 모습을 담은 갱스터무비가 유행했었고, 지난 세기말 홍콩은 중국으로의 반환을 앞두고 불안한 사회심리를 반영이라도 하듯 <영웅본색>으로 상징되는 대량의 ‘홍콩 느와르’ 영화들을 쏟아낸 일이 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공권력에 저항하고 반사회적 행위를 일삼는 조폭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현실사회에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약자를 구원하고 의로운 영웅이 부재함을 뜻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히려 사회지도층의 부패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 조폭의 출현은 공의를 상실한 현실사회에 대한 관객들의 허망한 심리를 엿볼 수도 있다.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2011)는 한국 현대사회에서 조폭이 권력과 얼마나 치밀하게 얽히며 애증의 관계를 이어왔는가를 보여주어, 값싼 주먹질이 난무하지 않으면서도 사회부조리를 간파할 수 있게 함으로써 조폭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평을 받을 만했다.
조폭영화가 미학적으로 가장 발전한 모습은 <신세계>(2013)에서 나타난다. 이제는 기업화하는 조폭의 외형을 조명하면서도 잔인한 그들만의 권력투쟁과 경찰과의 미묘한 긴장이 한국형 느와르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즉, 현재 조폭영화는 2001년에 비해 훨씬 세련되었고, 잔혹함의 강도 역시 상승곡선을 타고 있다.
이제 조폭영화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여 바둑계까지 그 발이 닿았다. 불과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사이에 바둑을 소재로 삼은 영화 두 편이 개봉한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조폭이 개입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문제는 대중성과 바둑의 묘미를 함께 살리지 못하는 데 있다.
기독교 영화가 흔히 문제점으로 지적받는, 재미와 성경적 의미를 통합하는 데 실패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기독교적 가치가 담긴 바둑영화를 만드는 것은 어떨까? 여성 프로기사인 조혜연 8단은 주일에는 절대 공식 대국을 갖지 않는 크리스천 기사로 유명하다. 2010년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하면서도 평일에 치러지는 단체전에만 출전했을 뿐 주일에 치르는 페어대국은 끝가지 고사했었다. 조혜연 기사는 당시 기독교 신자는 일요일에 기도 외에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나를 묻는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나도 일요일 예배를 마치면 책도 읽고 시험공부도 한다. 내가 만약 의사였다면 주일날 환자 치료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프로 기사여서 대국행위가 대부분 돈과 연결되므로 경제활동을 쉬겠다는 뜻이다. 내가 대국을 하지 않아 남들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
조혜연 기사의 일화에서 우리는 기독교바둑영화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고신대학교 국제문화선교학부교수. 영화평론가. 서강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저서《감성세대 여화읽기》이메일 moviejin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