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갓피플매거진

김성수 감독의 감기

재난영화를 종합하다
일이 잘 풀리고 상황이 안정적일 때, 사람들은 숨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괜히 불편하거나 부정적인 속마음을 펼쳐서 주위를 소란스럽게 만들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위기의 때는 다르다. 생존이 걸려있는 문제 앞에서 사람들은 인간 본심을 곧잘 드러낸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란 그래서 생긴 말이다. ‘재난영화’라는 장르가 갖는 특징도 여기에 있다. 외형적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장면을 묘사하는 블록버스터급 영상이 전면에 부각되지만, 이야기 속을 들여다보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겨진 심리가 보이는 것이다.

김성수 감독의 영화 <감기>는 국내에 밀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에 의해 감염된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의해 한 도시가 혼란과 위기에 빠진 상황 속에서 인간과 사회의 속내를 보여주고 있다. <감기>의 외형은 순수하기보다 이미 앞서 만들어진 영화들의 여러 모습들을 차용하여 비교적 익숙한 이야기를 눈앞에 펼친다.

원인불명의 바이러스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번지는 바람에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치료약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모습은 이미 <연가시>(2012)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남겨진 어린 딸을 찾고자 하는 가족의 노력과 정부의 행정적 대응 그리고 미국이 한국에서 행사하는 막강한 권력은 <괴물>(2006)에서도 발견된 것들이다.

외세에 대응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숭고한 모습은 영화 <한반도>(2006)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다 위기 속에서 사랑을 싹틔우는 이야기는 <타워>(2012)뿐 아니라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위기와 고난을 함께 겪은 남녀는 문제가 해결된 영화의 결말에서 반드시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 그렇다고 <감기>가 창의성이 전혀 없는 작품이란 뜻은 아니다. 오히려 여러 영화들의 특징들이 새롭게 구성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를 종합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이중적 생각
<감기>에 나타난 한국인의 속내는 이중적이다. 첫째,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기피와 돌봄의 이중성이 한국인들에게는 내재해 있다. (영화에서) 한국인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것은 외국인 불법노동자의 밀입국 때문이었다. 다문화사회라고는 하지만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여전히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의 과거 어려웠던 시절 때문인지 이들에 대한 동정심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영화는 어린 미르(박민하)가 도피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빵과 우유를 건네며 마음을 소통하는 장면을 매우 심도있게 보여준다.

둘째, 한국인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과 지도자에 대한 기대를 함께 갖고 살아가고 있음을 나타냈다. 국민의 생명보다 지역구에서 금배지를 다는 일이 중요한 권위적인 국회의원과 편의주의적인 행정처리에 익숙한 공무원들에 대한 불만을 한국인들은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대통령은 다를 것이라는 믿음을 함께 가지고 있다.

셋째,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가진 유일한 존재로 유치원에 다니는 미르를 설정한 것은 한국인들이 절망의 현실을 경험하면서도 한국의 미래에 소망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감을 나타낸다.

분당의 그리스도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제임스 카메룬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과 <감기>에 나타난 위기 상황 속의 인간은 어떻게 다를까? 두 영화는 모두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는 인간의 면모들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행동양식은 조금씩 다르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차이는 <타이타닉>에 기독교문화에 따른 죽음의 초연성이 엿보이는 반면 <감기>는 죽음과 위기의 상황 속에서 종교적인 인식은 모두 삭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타이타닉>을 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장면들이 있다. 4명의 악사들의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찬송가를 연주하고 침몰하는 선상 위에서 신부가 기도하고, 객실로 바닷물이 밀려오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에게 천국을 이야기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등이다.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사람들이 대응할 수 있는 여러 행동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의 남다른 면모도 있을 수 있다는 감독의 생각이 담긴 장면들이다.

그러나 <감기>에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대응은 찾을 수 없다. 영화의 배경이 분당이고, 그곳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보라. 많은 군중들 가운데 신앙적이면서 또한 합리적으로 위기의 상황에 맞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한 장면이라도 넣는 것이 사실적일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사회적 위기와 혼란을 묘사할 때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배제시켰거나, 아니면 우리 사회에서 예배당 건물은 많지만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인식되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그리스도인은 주일에 예배당으로 향하는 모습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인식시켜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 가운데, 특히 <감기>와 같은 죽음의 위기와 사회적 혼란 앞에서 더욱더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내야 한다. 사랑과 봉사뿐 아니라 길을 잃은 양떼들과 같은 군중들을 보호하고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지혜를 발휘하면서 말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시 32:7).

강진구
고신대학교 국제문화선교학부교수. 영화평론가. 서강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저서《감성세대 영화읽기》이메일 moviejin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