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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베니를 그리며 행복한 일러스트레이터 구경선

“이제는 볼 수 있는 날도 얼마가 될지 모르겠어요.
빛이 점점 사라지고 있거든요.
그렇지만 눈이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의 또 다른 인생이 있겠죠.
아직 혼자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오늘, 오늘이 저에게는 기적이에요.”
- 《그래도 괜찮은 하루》중에서 -

‘독립하기, 엄마와 단둘이 여행가기, 운전면허 따기,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연락처 물어보기…’는 일러스트레이터 구경선 씨가 자신의 다이어리에 하나씩 적어 나간 버킷리스트의 일부다. 구 작가는 청각 장애와 시각 장애가 함께 진행되는 ‘어셔증후군’이다. 두 살 때 열병을 앓고 청력을 잃고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됐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도 쉽게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성대의 울림을 손으로 느끼게 해 입모양을 그려가며 같은 소리가 나오도록 연습을 시켰다. 불분명한 발음이지만 말할 수 있게 됐다.

잘 듣지 못했지만 덕분에 ‘잘 그리는 아이’가 되었다.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스킨 작가의 일도 9개월 만에 통과를 한 것이다. 그렇게 2008년 싸이월드 스킨 작가로 데뷔한 이후 귀가 유난히 큰 토끼 캐릭터 ‘베니’와 함께 했다.

밋밋한 녹색 배경에 베니가 벌렁 드러누운 그림인 ‘다 귀찮아’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가 만들어낸 캐릭터 베니가 인기를 얻으면서 개인전도 열었고,《그래도 괜찮은 하루》(예담 간)라는 책도 출간했다. 작년 9월, 시야가 점점 좁아지다 실명할 수도 있는 희귀성 질환인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다.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해보기로 마음먹고 적기 시작한 것이 버킷리스트다.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마음속에 가득 차 있을 무렵 필리핀으로 선교 여행을 갔다. 태풍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한 소년을 만나면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 소년은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황에서도 사진작가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다는 말을 했다. 구 작가는 별 생각 없이 카메라를 든 그림을 소년에게 그려주었다. 소년은 한참 동안 구작가가 그린 그림을 품에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신기하게도 ‘왜 내 것만 자꾸 뺏어가는 거야’와 같은 마음속 분노가 가라앉았다. 구 작가는 한 줄기 빛을 본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아직 자신에게 많은 것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부터 버킷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해 하나씩 이루어가는 중이다.

요즘 버킷리스트는 어떻게 이뤄가고 있어요?
한꺼번에 많은 일들이 겹쳐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요. 지금은 80퍼센트 정도 진행했어요. 버킷리스트를 쓰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제 삶의 모든 것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고, 감사할 게 많아졌어요. ‘엄마에게 집 사드리기’를 추가했어요.

저는 젊으니까 얼마든지 고생해도 좋지만, 엄마가 내년에 환갑이시거든요. 지금까지 고생을 참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쉬게 해드리고 싶어요. 열심히 일해서 엄마에게 작은 집을 꼭 사드리고 싶어요.

토끼 베니는 어떻게 그리게 됐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었어요. 스물다섯 살에 어렵게 하나님을 다시 만났는데요. 그때는 직업도 없었어요. 친구들이 하는 십일조가 부럽더라고요. 저도 십일조를 하고 싶은데 돈이 없었거든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그림뿐이니까 이것으로 십일조
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직접 주보를 쓰고 그리면서 만들었어요. 그러다 캄보디아로 첫 선교를 갔어요. 그곳에서 좋은 일에 ‘그림’을 사용하고 싶은 꿈이 생겼어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캐릭터가 베니예요. 동물 중에 토끼가 제일 귀가 잘 들린대요. 저 대신 잘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게 됐어요. 제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베니가 대신 전해주니까 참 좋아요. 제가 죽어도 베니는 세상에 남아있을 테니까요.

하나님 안에서 터닝 포인트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10대 때는 중학교도 그만두려고 했고 고등학교도 진학할 마음이 없었어요. 청각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학교생활을 하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중학교 3학년까지 올라갔는데 한계에 다다를 즈음 하나님이 좋은 친구를 붙여주셨어요.

그 친구 때문에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가 생긴다는 정보를 얻었어요. 처음으로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했던 것 같아요. 20대 때는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꿈을 찾았어요. 싸이월드 스킨작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붙잡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야가 좁아지고 있는데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됐어요. 눈이 안 보인다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잖아요. 시력이 나빠진 요즘은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자신이 소중하단 걸 꼭 알았으면 해요. 저도 그걸 알기 전까지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 채 절망 속에서 살았거든요.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다면
빌립보서 4장 13절이에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엄마가 ‘너도 할 수 있어’라고 용기를 심어주면서 가르쳐준 말씀이거든요. 제가 제일 고마워하는 사람은 언제나 우리 엄마예요.

인생의 등불은?
저는 하나님이 없으면 정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힘겨운 씨름을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계시니까 믿고 싸우고요. 의지할 곳이 필요할 때도 그분이 계시니까 얼마든지 의지하고요. 절실하게 구하고 싶을 땐 주님 앞에 어린아이가 되고요. 살면서 혼란스러울 때 주님께 맡기면 되잖아요. 제 인생의 등불은 하나님입니다. 마음이 복잡할 때 즐거운 그림을 그리기가 힘든 경우가 있어요. 아이디어가 진짜 떠오르지 않을 때는 이렇게 기도해요. ‘하나님의 지혜를 저에게 조금만 빌려주세요’라고요.

12월에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기도제목은?
최근에 기도편지를 적기 시작했어요. 하나님께 매일 편지를 써요. 기도편지를 쓰고 나면 꼭 놀라운 일이 생겨요(웃음). ‘배우자를 위한 기도’가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에요. 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줄 배우자를 만나고 싶어요. 하나님이 저를 너무 사랑하셔서 아직 시집을 안 보내주시네요. 하나님의 선물인 배우자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꿈꾸는 비전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세상에 전부 나누고 싶어요. 하나님은 저에게 ‘나의 아버지’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분이시거든요. 하나님이 주신 베니라는 캐릭터로 작품을 만들어서 모두 나누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행복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전기장판을 틀어놓고 푹신한 이불을 덮고, 만화책을 잔뜩 빌려와서 새우깡을 먹으면서 보는 거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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