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의 시간이 생기면 무엇을 하겠는가? 그런 시간은 아마도 출퇴근길이거나 과제를 끝내고 잠시 숨을 고를 때쯤에 생길 것이다. 그 15분을 가장 보람 있게 보내는 방법 한 가지를 소개한다. ‘세바시’를 보는 것이다.
‘세바시’란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하 ‘세바시’)이라는 강연 프로그램의 약자이다. CBS(기독교방송) 채널로 방송되지만, 인터넷 모바일 시대인 만큼 유튜브 (youtube)나 팟캐스트 (podcast)로 보는 시청자들이 더 많아지면서 입소문이 난 지 오래다.
2011년에 시작돼 4년이 된 지금까지 세바시 무대에 오른 강사는 550여 명. 청소년, 사업가, 여행가, IT전문가, 대학교수와 외국인에 이르기까지 강사들의 연령대와 직업도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소통전문가 김창옥 교수, 아트스피치 김미경 원장 같은 스타 강사도 여럿 배출해냈다.
주제 역시 각각의 강연 영상이 끝날 때 화면에 펼쳐지는 수십 가지 키워드처럼 인생살이와 세상 전반을 두루 망라해낸다. 말 그대로 세상을 바꿀 만한 이야기들이다.
세바시를 시작했고 현재 책임 프로듀서 (Chief Producer)로서 제작을 총괄하는 구범준 피디(45세)는 세바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15분 정도의 시간에 전하는 짧은 이야기지만 거기에는 그 강사의 15년 인생 경험이 농축돼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들었을 때 ‘좋은 이야기다’, ‘유익하다’, ‘배운 게 있다’, ‘나도 저렇게 살아봐야겠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강연을 듣고 변화의 욕구를 느낄 대상은 개인이지만, 생각과 습관을 바꾸는 개인이 생기고 또 생겨난다면 프로그램 제목 그대로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 되는 것이다. 최근 프로그램 제작자면서 세바시 4주년을 기념해 직접 강연자가 되기도 한 구범준 피디를 갓피플이 만났다.
글 이한민 사진제공 ‘세바시’
“방속녹화가 아닙니다. 강연회입니다”
구 피디는 기독교방송(CBS) 에서만 17년차인 중견 프로듀서다. 라디오만 있던 시절에 입사해 시사교양을 담당하다 2002년 개국한 CBS TV로 발령받아 ‘영화감독 이장호, 누군가를 만나다’라는 토크 프로그램 등을 제작했다. 그러다 세바시를 기획, 2011년 5월 처음 강연회
를 열어 6월에 방송을 시작했다. 그러니 올해가 방송으로는 6월, 강연회로 치면 5월이 4주년이었다. 시청자는 세바시를 방송이라 생각했는데, 굳이 방송과 강연회로 구분하는 이유는 뭘까?
“저희 제작진은 세바시를 녹화한다고 말하지 않고 강연회를 연다고 말합니다. 보시는 거야 주로 온라인과 모바일을 통해서이지만 보통 500명에서 많게는 1000명이 모이는 오프라인 강연 현장이 우선 중요합니다.
방송에 나가지는 않지만, 강연하기 전에 모두 일어서서 춤을 배우기도 합니다. 마음을 여는 과정이 있는 것이죠. 페이스북을 보고 오신 젊은 여성이 저 같은 사람에게 ‘친구 사이’라고 아는 척을 하시고, 쉬는 시간도 없이 몇 시간을 들으시고서 끝나면 무대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가는 건 흔한 일입니다.
온라인을 중시해서 세바시 시작할 때부터 페이스북을 홍보용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지만, 평일에 시간을 내서 강연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의 열의와 입소문 효과는 그에 못지않게 대단한 것입니다. 참고로 매 번 강연회 때마다 처음 오는 분이 청중의 80퍼센트에 달합니다. 강연 현장을 체험해보겠다는 분들이 계속 이어진다는 뜻이죠.”
기독교 티를 안 내는 이유?
그의 명함을 보니 ‘15분’은 큼직한 반면 ‘CBS’는 사무실 주소에만 있어서 작다. 그 명함은 세바시의 ‘전략’을 암시한다.
“모든 사람이 기독교 텔레비전을 보는 건 아니죠. 크리스천이라고 기독교 콘텐츠만 보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뭘까’ 생각하다가 강연회를 열기로 했어요. 강연이라는 형식은 인류 역사에서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것이죠. 예수님의 산상수훈도 형식은 사실 강연이었잖아요.
또 이 프로그램 시작할 무렵이 모바일 사용자가 TV 사용자보다 많아지던 시절이었어요. 스마트폰도 1천만 대를 막 넘었고, 동시에 사람들도 자격증과 성적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배우려고 강연을 찾아다니고 강사도 늘어나는 추세였어요. 강연 문화가 그렇게 능동적으로 변하는 걸 보면서 모바일 플랫폼에서 강연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좋겠다,
기독교 색채를 드러내지 않고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과 좋은 내용을 나누어야겠다는 것이 처음 기획 의도였던 겁니다. 그 결과 기독교방송이 만드는 것이라면 편견을 가지고 보지 않았을 사람들이 세바시를 보고 우선 좋은 콘텐츠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게 기독교방송이 만든 것이고 강사도 크리스천인 걸 알게 되면 느낌이 달라지는 것이죠.”
세바시는 분명 CBS에서 만드는 것이지만 기독교 ‘티’는 거의 내지 않는다. 주변부터 강사를 물색하다 보니 강사들도 지금까지 70퍼센트 정도가 크리스천이었지만, 각자의 특별한 경험과 전공 분야를 중심으로 강연하는 것이라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강사 가운데 목사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는데, 전임 목회자는 구 피디가 출석했던 높은뜻숭의교회연합의 김동호 목사뿐이었다고 한다. 그 역시 세바시에서는 설교를 하지 않고 강연을 했다.
세바시의 강연 내용은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아 그런지, 신앙적인 내용을 간접적으로 담을 때가 가끔 있어도 별 저항이 없다고 한다. 이런 것이 세바시가 가진 힘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CBS가 만든다고 굳이 처음부터 크리스천 콘텐츠라고 밝힐 필요는 없지요. 크리스천이 전문성을 가지고 살아왔던 이야기를 전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런 걸 더 잘 흡수해요. 심지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보고 나서 ‘나도 저 사람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저 사람 이야기가 맞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그 사람이 크리스천이라는 걸 알게 되면 직접적인 전도 이야기를 듣는 것과 다르거든요. ‘아, 크리스천이라서 저런 이야기를 한 거로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공감하고 감동하는 게 더할 테니까요.”
교회 공동체 같은 제작 방식
세바시는 제작 방식도 독특하다. 방송 제작 현장에 흔한 ‘작가’가 세바시에는 없다. 그 결과 피디들과 더불어 강연자의 네트워크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강사가 강사를 소개하는 경우도 많고, 강연자들이 원고를 직접 써야 하니 강연에 진정성이 강화되었다. 피디는 원고를 보고 이야기의 순서를 바꿔보라거나 스피치에 대한 조언 정도를 해줄 뿐이다.
연예인의 팬클럽처럼 자원봉사 커뮤니티가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유튜브로 세바시를 보면 한국어는 물론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된 자막을 볼 수 있는데 청각장애인이나 재외교포 2세 등을 배려한 것이다. 이것은 놀랍게도 ‘세바시 열린 번역 프로젝트’라는 그룹의 자원봉사자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현재 2천 명이 넘는 회원 가운데 주로 활동하는 이는 100여 명인데 구 피디는 관리자 겸 회원일 뿐이다.
세바시에는 이밖에도 여러 형태의 팬 그룹이 온라인상에 존재한다. 이런 방식들은 소통과 네트워크, 커뮤니티를 지향하는 세바시만의 독특한 강점이자 자산이다. 어찌 보면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닮은 듯하다.
세상을 바꾸는 크리스천으로서 산다는 것
프로그램의 이름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어서만이 아니라, 그는 프로듀서라는 직업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해온 셈이다. 일반적으로 프로듀서라는 직업 자체가 세상에 주는 영향력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설교자 중에는 기독 청년들에게 방송 피디가 되어보라는 ‘비전’을 심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피디가 복음을 전파하는 데 효율적인 콘텐츠를 만드는 도구라는 점에선 유용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사람은 각자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피디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자체의 향기를 전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꽃이 향수 뿌려서 향기를 퍼뜨리나요? 각자의 일을 하는 과정 속에서 신앙과 신념, 철학을 잘 드러내면 될 것입니다.”
덧붙인 다음 말이 인상적이다.
“다만 무슨 일을 하든 세련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련되자’는 건 그윽한 향기를 담자는 뜻입니다. 그래야 많은 이들에게 접근할 수 있지요. 기독교라는 프레임을 전면에 씌우거나 기독교 용어를 내세우면 굉장히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접근할 수 있어요.”
잘 듣고, 들은 대로 해보기, 지속적으로!
‘세바시’를 본 이들이 떠올리는 키워드 가운데 ‘소통’이 많은 편이었다. 제작자가 사람과 사람 사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소통을 깊이 생각하고 배려하니 그렇게 된 건 당연해 보였다. 소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구 피디에게 물었다.
그는 사람들을 알고 소통하기 위해, 의자에 앉아 있지만 말고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라고 했다. 그러다보면 의외의 수확도 얻을 수 있다. 한번은 강사를 찾아볼 겸 방문한 어떤 세미나에서 미국의 세바시라는 테드 (TED)의 모바일 앱 제작자를 만났다. “한국에도 테드 같은 세바시가 생겼다던데 이런 걸 쓰면 좋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 제작자에게 그가 말했다. “제가 그 세바시의 피디인데요.” 30만 명이 사용해온 세바시 앱은 그날의 만남 덕분에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것이다.
“소통하려면 당연히 잘 듣는 게 중요한데요,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들은 것을 실천하는 훈련입니다. 한 달에 서너 번 좋은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 중에 한 가지만이라도 하면 됩니다. 또 이왕 하려면 지속해야 합니다. 미국 뉴욕 거리에서 아무나 만나 사진 하나 찍고 짧게 인터뷰한 글을 ‘휴먼스 오브 뉴욕’(humans of NY)이라는 자기 사이트와 페이스북에 꾸준히 올린 84년생의 백수 청년(브랜던 스탠턴)이 있습니다. ‘좋아요’가 1300만 명이 넘고, 얼마 전엔 백악관에서 오바마까지 인터뷰했죠. 그건 그가 그 일을 꾸준히 지속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미국에서 100회 강연회를 열게 될 세바시도 지속성을 고심하고 모색하는 중이다. 좋은 일을 지속하려면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뒷받침돼야 하는 탓이다.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를 주제로 교육사업도 개설하고, 세바시 말고도 ‘성장문답’과 ‘이런 십장생’도 최근 시작했다. ‘성장문답’이 이 시대 대표 멘토들로부터 듣는 ‘인생 고민에 대한 조언’이라면 ‘이런 십장생’은 김창옥 교수의 일상을 제작진이 따라다니면서 삶을 성찰하는 이야기다. 요즘 뜨는 예능 프로그램 비슷해서 ‘…십장생’에서는 구 피디도 종종 등장한다. 좋은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지속적으로 전하려는 그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