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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따라걷기 #01] 예루살렘과 그 주변 : 마가의 다락방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 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 1:13,14)

[caption id="attachment_79789" align="alignnone" width="841"] 시내산 : 이집트 시나이 반도의 아랫자락에 있는 바위산 가운데에서 사진 왼쪽 가장 높은 봉우리를 “모세 산”(Jebel Musa)이라 부른다. 출애굽(니산/아빕월)한 지 세 번째 달(시반월)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하였다. 도착한 지 셋째 날인 시반 월 3일부터 이틀에 걸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백성들이 옷을 빨며 스스로 정결하게 하였고, 사흘 후인 여섯째 날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 가운데 나팔 소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강림하셨다. 출애굽기 19장은 당시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였고, 하 나님이 불 가운데서 강림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caption]


지금으로부터 약 3,300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칠칠절( שבעות 샤부옷)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샤부옷이라는 말은 영어로 ‘weeks’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유월절부터 칠칠절까지 일곱 주간의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칠칠절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명절입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표현하듯이,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여 설명하는데, 유대인 랍비들은 칠칠절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결혼식과 같은 절기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샤부옷을 동음이의어인 “맹세”라는 의미로도 이해합니다.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 간의 맹세가 담겨 있는 율법과 그 율법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뜻이지요. 칠칠절이 시작되는 저녁에는 여자들이 촛불을 켜고 명절이 시작되는 것을 알립니다. 그리고 이틀간의 칠칠절 기간 중 첫날 밤은 다들 잠을 자지 않고 성경을 읽고 배웁니다. 모든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 회당으로 가서 십계명 낭독을 듣습니다.


유대교의 달력

[caption id="attachment_79790" align="alignnone" width="839"]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달력이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숫자로 첫째 달, 둘째 달과 같이 세는 달력과 달별로 고유한 이름이 있는 달력이다.[/caption]


칠칠절의 다른 이름은 맥추절( חג הקציר 하그 하카찌르, 출 23:16)입니다. 맥추절은 말 그대로 보리(밀)를 수확하는 절기예요. 농사력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지요. 이스라엘의 날씨는 우기와 건기로 나
누어져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우기(대략 9월 말-10월 중순 사이에 시작해서 3월 말-4월 중순까지)는 유월절에 끝나는데, 우기가 끝나면 아라비아 사막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옵니다. 아랍어로는 함신이라고 하는데 숫자로 50을 뜻합니다.

유월절부터 오십 일 동안 뜨거운 바람이 불어서 우기 때에 자란 밀과 보리가 영글면 수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드렸는데, 그래서 초실절( יום הביקורים 욤 하비쿠림, 출 34:22 ; 민 28:26)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잘알려진 성경 이야기가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가 등장하는 룻기입니다. 그래서 칠칠절에는 십계명과 함께 다윗 왕의 직계 선조의 이야기인 룻기를 읽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칠칠절이나 초실절 또는 맥추절이라는 이름보다 오순절(πεντηκοστῆς 펜테코스테스, 행 2:1. LXX πεντηκοστός, 마카비하 12:32)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합니다. 오순절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샤부옷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일 텐데, 이 단어는 특별히 사도행전 2장부터 소개되는 것과 같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 강림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은 지금 예루살렘의 시온산에 있습니다. 시온산(시온산성)이라는 말은 사무엘하 5장 7절에서 나오는데, 이 성경 구절에 근거하면, 현재 시온산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성경과는 관계가 없는 지역입니다.

다윗이 빼앗은 시온산 위의 성은 지금의 시온산 아래에 ‘다윗의 도시’(City of David)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학자들은 시온산이라는 지명이 가리키는 곳은 처음에는 다윗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빼앗은 현재 다윗의 도시 지역에서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산 일대를 포함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가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기 전(68년경)에는 예루살렘 성벽이 두르고 있는 성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다고 의견을 내놓습니다. 그 예루살렘 성 중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 현재 시온산이라고 불리는 지역인 것이지요.

현재의 시온산과 오순절을 말할 때마다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이 마가입니다. 마가(Mark the evangelist)에 대해서 흔히 오해하는 것이, 그가 사도 중에 하나였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사도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을 말하는 거죠.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시몬, 바돌로매, 맛디아(맛디아 이전에는 가룟 유다), 이 열두 명이 사도입니다.

마가가 누구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성경이 주는 단서는 별로 없습니다. 초대 교부들의 글에도 마가의 직업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나올 법한데, 제가 찾은 데까지에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태는 세리였고, 누가는 의사였고, 요한은 어부였는데 말이지요.

마가가 뭐하던 사람이었다고 억지로 우기지는 않겠습니다만, 마가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마가의 집 위치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지리적으로 높은 지역에 거주하였고, 그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그 아래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집을 지은 위치만 보더라도 누가 더 높은 계층의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지요.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은 상부 도시와 하부 도시로 나뉘어 있었는데, 마가는 상부 도시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마가의 집이 제사장 가야바의 집보다도 더 높은 곳에 있었어요. 헤롯의 궁전을 기준으로 했을 때도 마가의 집은 가야바의 집보다 훨씬 가까웠습니다.

비록 종교적으로는 가야바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었지만, 정치 경제적으로는 마가가 가야바보다 더 상류층 이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해주는 증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79791" align="alignnone" width="939"] 예루살렘 성 : 예루살렘 성을 1/50로 축소해놓은 예루살렘 성 모형은 현재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에서 붉은색 지붕이 있는 지역이 상부 도시이고, 그 오른쪽 비탈로 지붕이 없는 하부도시들이 있다. 마가의 집은 상부 도시에, 그리고 제사장 가야바의 집은 하부 도시의 맨 위에 있다.[/caption]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계실 때 마가의 집에 머물곤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마지막 만찬을 나누던 바로 그곳이 마가의 다락방이었거든요.

예수님의 안전을 보장받기에 마가의 집만큼 안전한 곳도 없었을 거예요. 적어도 가야바가 마음대로 자기의 수하들을 들이닥치게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집을 빌려주었다고 마가의 신앙도 그만큼 영글었다고는 말하기 힘든 것 같아요.

이집트 곱틱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벗은 몸으로 도망한 제자가 마가였다고 하니 말입니다(막 14:51,52).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이전의 마가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지켜본 마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두려움을 물리치고 120명이나 되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자기의 집 이층을 내어주고 오순절이 되기까지 함께 기도하였으니 말이지요(먹거리를 제공했을 테니 그 돈만 해도 대단했을 겁니다).

제롬(347-420 CE)은 마가가 야고보가 죽던 다음 해에 순교하였다고 말합니다만,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순교를 당하였는지는 자세하게 설명해놓지 않아 무어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Lives of Illustrious Men, ch. 2, 8). 그러나 제가 마가라면 마지막 순교의 순간에 떠올렸을 과거 중의 하나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겟세마네에서 벗은 몸으로 도망쳤던 부끄러운 기억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하지만 순교를 앞둔 마가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가에게는 그 도망의 기억과 함께 오순절에 자기의 집에서 경험하였던 뜨거웠던 성령 체험의 기억과 더불어 재림하실 주님과 함께 부활의 약속을 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마가의 다락방에서는 모스크인지 집인지 알 수 없는 장식물들에 정신을 놓기보다는 그날밤, 살과 피를 나누어주셨던 예수님과 오순절에 임하셨던 성령을 기억하며,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된 우리 신앙의 열매가 무엇인지 헤아려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합니다.

[caption id="attachment_79792" align="alignnone" width="837"] 마가의 다락방 : 마가복음 14장 15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유월절 식사를 하신 곳을 ‘큰 다락방’(άνάγαιον μέγα, 아나가이온 메가)이라 하고, 사도행전 1장 13절에는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던 곳을 ‘다락방’(ὑπερῷον, 휘페론)이라고 한다. 마가와 누가가 서로 다른 그리스어를 사용하여 다락방을 표현하였지만, 그 두 단어는 모두 2층의 방을 가리킨다. 4세기부터 기독교인들이 시온산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을 순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당시에도 마가의 다락방은 회당으로 사용되었는데, 기독교인들의 회당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009년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교회이자 회당이 이슬람의 모스크로 바뀌었다. 다시 십자군 시대에 시리아 정교회와 가톨릭교회가 16세기까지 이곳을 관리하였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 시대에 이르러 다시 모스크가 되고, 현재 모스크의 흔적이 마가의 다락방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cap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