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직접 전파하는 일만으로 세상을 향한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또 다른 중요한 방법 하나는 바로 “착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 지체 장애인을 고친 일에 대해 “착한 일”이라고 표현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본래 그 장애인은 베드로에게 한 푼 적선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착한 일, 즉 구제를 해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보다 근본적인 착한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사람의 장애를 근원적으로 고쳐주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착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착한 일의 의미를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경제적이거나 정신적인 도움을 주고 따뜻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환경이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고 돌보며 먹을 것을 주는 착한 일에 대해서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넬료의 구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구제 헌금, 귀신 들린 소녀를 보고 불쌍하게 여겨 고쳐 준 바울,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배의 죄수들을 직접 돌본 바울, 직접 나서서 불 땔 나무를 준비하는 바울의 모습 등 여러 차례 나타납니다. 이런 착한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일터에서 착한 일을 하고 있습니까?
본래 그 장애인은 베드로에게 한 푼 적선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착한 일, 즉 구제를 해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보다 근본적인 착한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사람의 장애를 근원적으로 고쳐주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착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착한 일의 의미를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경제적이거나 정신적인 도움을 주고 따뜻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환경이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고 돌보며 먹을 것을 주는 착한 일에 대해서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넬료의 구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구제 헌금, 귀신 들린 소녀를 보고 불쌍하게 여겨 고쳐 준 바울,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배의 죄수들을 직접 돌본 바울, 직접 나서서 불 땔 나무를 준비하는 바울의 모습 등 여러 차례 나타납니다. 이런 착한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일터에서 착한 일을 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