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재앙을 당한 욥에게 찾아와 문상하던 친구들 중에서 아마도 연장자인 엘리바스가 첫 번째로 입을 열어서 욥에게 말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의 핵심은 죄 없이 망한 자가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욥 4:7). 그 말을 듣고 난 욥이 자신을 변명하면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재앙을 당할 만큼 죄 짓지는 않았다는 것을 엘리바스도 잘 알고 있으면서 위로자가 되어주지 못하는 것을 한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듯이 말했습니다.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참 처절합니다. 아침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침 삼킬 동안도 놓아주지 않고 간섭해 주시는데 그것이 세밀하고 따뜻한 인도와 배려가 아니라 고통스러움이라면 얼마나 견디기 힘들 것입니까? 욥은 절망적으로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21절하)라는 고백으로 엘리바스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도 살아가면서 욥이 겪었던 것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욥과 같은 정도의 고통을 받지는 않더라도 이유도 분명치 않아 보이는 수많은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욥과 같이 이렇게 문학적으로만(?) 하나님께 자신의 심경을 토로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깊은 사랑을 꼭 기억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갑시다.
참 처절합니다. 아침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침 삼킬 동안도 놓아주지 않고 간섭해 주시는데 그것이 세밀하고 따뜻한 인도와 배려가 아니라 고통스러움이라면 얼마나 견디기 힘들 것입니까? 욥은 절망적으로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21절하)라는 고백으로 엘리바스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도 살아가면서 욥이 겪었던 것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욥과 같은 정도의 고통을 받지는 않더라도 이유도 분명치 않아 보이는 수많은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욥과 같이 이렇게 문학적으로만(?) 하나님께 자신의 심경을 토로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깊은 사랑을 꼭 기억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