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며칠 전 예수님이 베다니에 사는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한 여자가 값진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향유 옥합은 보통 당시의 여인들이 결혼 지참금으로 오랜 세월동안 마련하던 것으로 노동자의 1년 품삯보다 높은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그 귀한 향유의 냄새가 순식간에 온 집안을 가득 채웠을 것인데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때 어떤 사람들은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그들은 말하기를 그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다면 더 가치 있었을 것이라면서 그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일종의 과소비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여인 대신 예수님이 대답해주셨습니다.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6-8절).
예수님도 가난한 자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명절 때 제자들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도 꾸준히 하셨습니다(요 13:29 참조). 그런데 이 여인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해석이 달랐습니다.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데 그 장사(葬事)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9절).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 한 번인 것처럼 단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도 예수님으로 인해 생명 얻은 사람들이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과소비’를 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요청을 받는다면 기꺼이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