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낯선 하나님’이란 표현을 쓰셨습니다.
이삭을 주시고는 다시 바치라고 하셨던 아브라함의 "낯선 하나님"
출애굽 하라 하시고는 홍해를 직면케 하셨던 모세의 "낯선 하나님"
여리고성을 정복하되, 침묵으로 7일간 성 주위를 돌라 하신 여호수아의 "낯선 하나님"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으시고는 도망자 신세로 살게 하신 다윗의 "낯선 하나님"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는 무서운 강풍과 강진 그리고 모든 것을 삼킬만한 두려운 불 속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셨던 엘리야의 "낯선 하나님"
적대국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요나의 "낯선 하나님"
메시야 임에도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따르라 하신 제자들의 "낯선 하나님"
고통과 절망 중에도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으로 감싸 안으시는 나의 "낯선 하나님"
실제로 살아가면서 ‘낯선 하나님’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너무 큰 고난으로 힘들 때, 너무 오래 지속되는 고난에 지칠 때,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이 아닌 낯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하면 어떤 분이라는 나름대로의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낯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아는 새로운 눈이 뜨이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 같은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버림받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하였던 하나님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는 순간일 뿐입니다.
똑같은 씨가 자라기 힘들고 열악한 환경인 산에 뿌려지면 산삼이 되고, 그냥 밭에 뿌려져서 평범하게 자라면 인삼이 됩니다. 열악한 환경에 뿌려진 씨가 산삼이 되는 이유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뭔가 특별한 물질을 만들어내는데 그렇게 만들어 낸 물질이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산삼인 것입니다.
자신 인생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이 낯설게 여겨진다면 산삼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보니 편안한 밭이 아니라 낭떠러지 외진 곳, 햇볕도 별로 들지 않는 깊은 산 속인 것 같다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인삼이 아니라 산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6년이면 다 자라서 팔뚝만한 인삼이 되는데 나는 15년이 지나도 새끼손가락만 하다면, 아브라함도 요셉도 모세도 다윗도 다 그렇게 산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낯선 하나님’ 조차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그 경험들, 그 오랜 인내의 시간들이 결국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복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낯선 하나님일지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은혜를 갈망하며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또한 언제까지 낯선 하나님으로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낯선 하나님이 곧 친밀한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이 친밀함은 연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교제를 통해 만들어집니다.
제게 아내가 낯설지 않고 친밀하게 느끼는 것은 아내에 대해 연구해서가 아니라 아내와 36년간 같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주님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예수 동행’을 외치며 주님을 바라보았던 하루를 매일 기록하며 살아 보니 어느 순간 주님과 친밀해졌음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