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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투데이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의 위대한 마지막 사자

‘불도저’라는 별칭으로 불린 아리엘 샤론은 임무를 어떻게 완수해야 하는지를 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지도자이자 용사였다. 국가의 뚜렷한 목표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굽히거나 규정을 깨는 것조차 겁내지 않았던 샤론의 성격은 종종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접근 방식은 이스라엘을 재앙에서 여러 번 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은 그를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야전 사령관’이라고 묘사했다. 침착함을 유지하고 전투의 흐름을 바꿀 줄 아는 그의 불가사이한 능력 때문이었다. 샤론은 후에 정치 무대에서도 그러한 침착성과 자신감을 나타냈다. 여기 샤론의 뛰어난 군사적, 정치적 업적의 화려한 면을 소개한다.

1928년 2월 26일: 텔아비브 근방에서 러시아 이민자 부모에게서 출생함.

1942: 14살 때 샤론은 영국 통치에 저항하여 싸우기 위해 유대인 지하 민병대 조직에 참여함.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전쟁 당시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 용기를 인정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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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국경의 테러 공격을 막기 위해서 이스라엘 101부대를 창설하여 이끌었고, 테러범들이 조직된 요르단과 이집트 도시들에 파괴와 폭동을 조성함.

1956년: 시나이 캠페인 동안 샤론은 상관들의 명령을 무시하고 전략적인 미틀라 패스를 점령하였고, 수에즈 운하에서 이집트 군대를 격파함.

1967년 6일 전쟁: 샤론은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장갑 부대에게 명령을 내려, 시내 반도에 있는 이집트 방위군을 섬멸하였다. 군대 전문가들은 그의 병법과 전략을 칭송했고, 오늘날까지도 다른 나라의 전쟁 대학에서 연구되고 있음.

1971년: 가자에서 혹독한 반테러 캠페인을 실시하여 이스라엘 시민들에 대한 공격을 급감시킴.

1973년 7월: 우익 정당인 리쿠드당 창당에 도움을 줌.

1973년 10월 욤키푸르 전쟁: 샤론이 은퇴한지 몇 달 후에 이집트와 시리아의 갑작스러운 공격이 있었고, 이스라엘이 파멸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고조되자 샤론이 다시 복귀한다. 샤론은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 반격의 선두에 섰고, 이집트의 강력한 제3의 군대를 포위한다. 카이로를 향한 그의 진격은 세계 열강이 개입하여 휴전을 이끌게 함.

1977-1981년: 새로운 리쿠드 정부의 내각 각료로서 샤론은 유대와 사마리아, 가자에 유대인 정착촌을 확장시킴.

1982년 4월: 국방부장관으로서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군 철수와 그곳에 있던 유대 정착촌의 강제 철거를 감독함.

1982년 6월: PLO의 국경 공격을 종결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총지휘함. PLO는 레바논에서 축출되었지만, 동맹을 맺었던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가 베이루트 근처에서 팔레스타인 일반 시민들을 학살한 것으로 인해 국방부장관직에서 물러남.

1990-1992년: 건설부 장관으로서 샤론은 전 소련 연방 출신의 새로운 백만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을 확보함.

2000년: 야당 당수로서 샤론은 이스라엘의 주권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성전산을 방문했고, 이로 인해 제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봉기)가 발생함.

2001년 3월: 총리 선거에서 대승을 거둠.

2003년: 선거에서 재선되고 이스라엘 보안 장벽 설치를 시작함.

2005년 8월: 가자로부터 이스라엘을 철수시키고, 21개의 유대인 정착촌을 철거시켰고, 8,500명의 유대인들을 고향에서 쫓아냄.

2005년 11월: 리쿠드당을 떠나 중도파 카디마당을 창당함.

2006년 1월 4일: 심각한 뇌졸중으로 혼수 상태에 빠짐.

2014년 1월 11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함.

Picture -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