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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투데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슬로를 회고하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주었지만, 평화를 위한 희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반대로 2000-2004년에 있었던 제 2차 인티파다 (팔레스타인 봉기) 동안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피의 물결을 목격했다. 의 기자 에찌 엘리라즈는 오슬로 협정 20주년을 맞아 다양한 정치 성향을 가진 이스라엘 정치인들과 작가들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이스라엘에서 대규모로 발행되고 있는 신문 와의 인터뷰에서 고 이츠학 라빈 총리의 참모 총장이었던 에이탄 하버(73세) 는 오슬로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 했다. “라빈이 오슬로 협정에 서명하기 위해 빌 클린턴과 야세르 아라파트와 백악관 잔디로 내려오기 몇 분 전에 나에게 말했습니다: ‘구역질이 나지 않도록 약을 먹은 다음 가겠습니다.” 하버는 “라빈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생각을 바꾼 세 가지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 1991년 걸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라크의 미사일들이 떨어지자 500,000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피했습니다. 라빈은 사람들이 전쟁에 지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 라빈은 1967년 육군 참모총장 시절 이루었던 6일 전쟁과 비슷한 승리가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 라빈은 이란과 파키스탄 같은 이슬람 국가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서 아랍 이웃과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평화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들 국가들의 핵무기는 이스라엘의 억지력을 허물수도 있습니다.

메이르 샬레브, 65세, 작가

“모든 협정은 작은 한 걸음을 나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꿈 속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협정에 서명을 해도 오늘 당장 평화가 오지는 않겠지만, 평화에 더 가까이 다가갈 것입니다. 이웃들을 ‘샬롬’으로 빨리 맞이하면 할 수록, 우리는 진보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단 한번의 평화 협상이 두 국민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꿈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하손, 58세, 중도-좌파 카디마 당 국회의원, 신베트 국가 안보국 전 차관 :

“오슬로 당시의 목표는 단 칼에 모든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습니다. 이어서 계속된 팔레스타인 테러는 우리가 좀더 신중하게 행동할 것과 마지막 협상을 향해 무턱대고 성급하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아미르 페레츠, 61세, 중도-좌파 하트누아 정당 출신의 내각 장관 :

“오슬로 협정은 두 국민을 위한 두 국가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하트누아에 있는 우리는 이것이 평화 협상을 계속하기 위한 필수 요소라고 믿고 있으며, 협상을 지속하는 한 우리는 연합 정부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지역의 상황은 극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상황에 있는 이집트, 시리아, 이란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른 아랍 국가들이 겪는 위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슬로는 올바른 결정이었습니다.”

아푸 아그바리아, 64세, 하다쉬 당 아랍 국회 의원 :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평화와 타협으로 이끌어 줄 모든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오슬로 협정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두 국민을 서로 받아들이게 했기 때문에 긍정적이며, 결국에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슬로의 지도자인 야세르 아라파트와 이츠학 라빈이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사라지자,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또한 아라파트가 살해 당했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그를 독살했다고 비난하고 있으며, 라빈은 정통주의 유대인에게 암살 당했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의 악의 세력은 정치적으로 오슬로 협정을 허물고, 실패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메르 바르 레브, 60세, 좌파 노동당 국회 의원

“오슬로 협정은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가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했던 것만큼 극적이었습니다. 낙천주의자들은 우리가 2-3년 안에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협정에 서명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 협정은 현실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가 전에 테러범들과 싸울 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대안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슬로 전에는 상황이 불가능했지만, 오늘날에는 매우 어려울 뿐입니다.”

엘리 아미르, 76세, 작가 :

“오슬로는 성공이자 해결책이었습니다. 두 국민들 모두 서로를 받아 들였습니다. 하지만 오슬로는 마무리 되지 못했고, 양측 모두 반대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슬로 이후 이스라엘은 요르단과 평화 협상에 서명할 수 있었으며, 페르시아 걸프 지역의 아랍 국가들과 비공식 유대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아랍 세계는 이스라엘과의 갈등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라빈이 살해 당하자, 노동당은 힘이 약해졌고, 아라파트는 [2000년] 캠프 데이비드에서 [당시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바락의 관대한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오늘날 중동의 현실은 다릅니다. 서방은 변하고 있으며, 워싱턴은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고, 새로운 정권이 아랍 세계에서 부상하고 있습니다.”

로니 샤키드, 66세,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아랍 정세 전문가 :

“오슬로 협정은 두 국민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좋은 의도와 순수함으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바라던 평화를 더 멀어지게 해버렸습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깊은 심리적인 뿌리를 가진 국가적, 인종적, 종교적 문제입니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두 국민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슬로는 궁극적으로 두 지도자들 사이의 협약이었지만, 두 국민들 간의 평화를 이끌지는 못했습니다.”

지브 엘킨, 42세, 외무부 차관, 여당 우익 리쿠드당

“저는 처음부터 오슬로 협정을 반대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Step by Step’방법의 결과에 대해 경고한 바 있습니다. 오슬로 협정은 오늘날 모두가 인정하는 실패작 입니다.”

암람 미츠나, 68세, (하트누아의) 국회 의원이자 전 IDF 장군 :

“오슬로 협정은 유대와 사마리아, 가자 지구에 있던 팔레스타인 국민들에 대한 책임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 타개책이었습니다. 이 협정은 상대방을 인정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라빈이 암살되고, 그 후 우익 정부가 들어서면서 오슬로 협정이 완전히 이행되지 못한 점이 슬픕니다.”

사미 미카엘, 87세, 작가 :

“오슬로 협정은 두-국가 해법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또 다른 함정과 더 많은 유혈 참사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아비그돌 리버만, 55세, 극우파 이스라엘 베테이누 정당 당수이자 전 외무부 장관

“오슬로 협정의 주요한 실수는 그 구조였습니다. 물리학처럼 정치에도 변하지 않는 원칙들이 있습니다. 오슬로는 자동적으로 안보와 강한 경제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위에서 아래로 강요하는 평화를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영역에서는 그 반대가 실제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안보를 쥐고 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제대로 경제적 역할을 할 때, 우리는 마지막 협상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 아얄론, 57세, 전 외무부 차관이자 전 이스라엘 베이테누 국회의원 :

“과연 오슬로 협정이 실패 했는지 그리고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스라엘의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협정은 실패했습니다. 약속들이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1998년에 5년 간의 임시 협정 달성 이후 영구적인 합의가 없었고, 20년 후 두 국민들 사이의 분열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불신은 증가되었습니다. 두 국민들 사이의 역사적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유대 국가로 인정하고, 이스라엘의 영원하며 하나인 수도 예루살렘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측에서 그런 대담한 결정을 내릴 지도자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