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이스라엘투데이

정치인이자 투사

이스라엘이 1980년대와 90년대에 강경파 리쿠드당의 당수로 두 번의 임기 동안 총리직을 맡았던 이츠학 샤미르에게 작별을 고했다. 1.5미터의 단신의 샤미르는 무척이나 다부진 사람이었다.

“그는 키가 작았지만, 거대한 지도자였습니다”라고 샤미르의 참모였던 요시 벤-아하론이 말했다. “저는 유대 백성과 이스라엘 땅을 위한 그의 고집스런 헌신에 감탄했습니다.”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샤미르는 보수적인 리쿠드당 출신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반대했으며, 성경의 땅 이스라엘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지지했다. 그는 아랍에 양보하는 것은 위험하고 헛된 일이라고 믿었다. “아랍인들과의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파괴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는 과거에 밝혔다. “그들은 평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1915년 폴란드에서 이츠학 자제르니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고, 1935년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으며, 영국 위임통치로부터 독립을 위해 싸웠던 유대인 민병대 레히에 가담해, 마침내 지도자가 되었다. 레히는 1948년 예루살렘에서 UN 중재자였던 로크 베르나도트 백작의 암살을 포함해 일련의 공격을 감행했고, 영국은 이 단체를 테러 집단으로 인식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후, 샤미르는 유명한 모사드 첩보국 요원이 되었다. “그는 매우 중요한 작전들을 감독했습니다”라고 샤미르 밑에서 이스라엘 내각으로 있었던 로니 밀로가 말했다. “한 번은 그와 텔아비브 거리를 걷다가, 거리 이름에 대해서 물었는데, 그는 텔아비브 거리 이름보다는 카이로와 다마스커스 거리 이름들을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샤미르의 총리 임기 중 발생한 주요 사건으로는 수천 명의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을 거대한 공수 작전을 통해 이스라엘로 데려온 것과, 제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봉기), 그리고 1991년 제1차 걸프 전쟁으로 이라크는 39발의 스커드 미사일을 이스라엘에 발사했다.

“이츠학 샤미르는 이스라엘 건국 전후의 용감한 전사였습니다”라고 시몬 페레스 대통령이 말했다. “그는 성실과 신념으로 나라를 섬기고, 진정 이스라엘을 사랑한 위대한 애국자였습니다.”

Picture - 애국자를 위한 찬사: 샤미르는 일생을 유대 국민과 이스라엘 땅을 위해 헌신했다. (Tribute to a patri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