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ITARY
이스라엘투데이

전쟁의 추억: 제 3편 (최종회)

1982년 레바논 전쟁

종군 기자인 나는 이전에 경험한 전쟁에서는 실제 전투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레바논 전쟁 동안에는 거리와 주택들 주위로 실제 전투가 내 눈앞에서 벌어졌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와 남부에 위치한 아드 다무르 도시에서 나는 폭격 받은 주택 사이를 포복으로 기어다녔고, 총탄 구멍을 통하여 길 건너 적들의 사진을 찍었다. 전투는 매우 혼란스러워 레바논 민병대를 구별하기 힘들었다. 누가 이스라엘의 우군이고 누가 유대 국가를 파괴하는 PLO 테러 단체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11개의 단체들과 마주쳤는데, 그 중에는 파타, 알-사이카, 인민전선 같은 조직들도 있었다. 그들의 휘장에는 유대와 사마리아가 포함된 이스라엘, 그들이 ‘해방시키기’ 원하는 영토 ‘팔레스타인’이 그려져 있었다.

수년 동안 이스라엘의 남부 지역은 야세르 아르파트의 PLO의 로켓 공격을 받고 있었다. 유엔 ‘평화 유지’ 군이 휴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둔하고 있었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1982년 6월 6일 PLO가 있던 곳에 총공격을 감행했고, 제 1차 레바논 전쟁이 시작되었다.

PLO의 테러 기지들 중 한 곳이 베우포트의 십자군 요새에 있었는데, 그 요새는 높은 바위 위에 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이스라엘 도시와 키부츠들을 향해 로켓을 쏘았다. 로켓들은 당시 베우포트 기슭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 군인들 머리 위로 날라갔다. 유엔 기지를 방문했을 때, 하이테켄 맥주 캔들이 산같이 쌓여있는 것을 보고, 그 이후로 나는 하이네켄 맥주를 마시지 않는다.

나는 PLO가 기독교 도시인 아드 마투르에 얼마나 난폭한 행동을 자행했는지 결코 잊지 못한다. 교회에는 죽은 기독교인들이 누워있었고, 교회의 십자가들은 마치 타격 연습을 하듯 총격을 받아 조각 나 있었다. 내가 독일 잡지 신문 기자와 함께 매로나이트 교회 안으로 들어 갔을 때, 그녀는 죽은 한 명의 PLO 남자 사진만 찍었고, 그 옆에 누워있던 14명의 기독교인들 사진은 찍지 않았다.

레바논에는 PLO에 대항해 15개의 기독교 민병대가 싸우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여러 개의 신문기자 카드를 가지고 다녔다. 검문을 받게 되면, 정확한 신문기자 카드를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또한 사브라와 샤틸라에 있던 난민 수용소에도 들어 갔었다. 그곳에서 기독교 팔란지스트들이 저지른 학살을 목격했다. 당시 세계는 이에 대해 이스라엘을 비난했었다. 썩어가던 시신들의 악취는 잊을 수가 없다.

해변 도시 시돈에는 지중해로 접근할 수 있는 지하 수로가 있는데, 그곳에는 러시아가 만든 미니 잠수함들이 있었다. 이것은 섬뜩한 일이었다. PLO 군인들이 언제든지 이곳에 와서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르제윤에서 나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다리 사이로 피를 흘리며 걷고 있던 한 기독교 소년을 기억한다. PLO 모슬렘들은 이 소년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8살짜리 아이를 반복해서 강간했다고 유엔이 후에 발표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나는 메나헴 베긴 총리와 국방부 장관 아리엘 샤론과 함께 베우포트에 있는 십자군 요새를 다시 방문했다. 전쟁 동안 214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사망했고, 1,114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3명이 전투 중 실종되었다. 하지만 레바논 내전 (1975-1990)은 훨씬 더 큰 사상자를 냈다. 90,000명이 생명을 잃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레바논 기독교 우군들과 그 가족들이 유대 국가로 넘어와 일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준 것은 긍정적인 일이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나는 베이루트에 있었고, 아라파트는 5,000여명의 PLO 테러범들과 함께 레바논에서 쫓겨났다. 내가 지붕에서 그들을 찍고 있었을 때, 저격병이 나에게 총을 쏘기도 했다. 어디서나 나를 보호하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를 드린다.

Picture - 종군 기자: 전선으로의 여정 (War correspondent)
PLO에 맞서다: 베긴 (오른쪽)과 샤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