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ITARY
이스라엘투데이

전쟁의 추억

지난호에서 나는 1973년 욤키프르 전쟁 당시 이집트에서 종군 기자였던 나의 임무에 대해 기술했었다. 이번 호에서는 같은 전쟁 동안 다마스커스 25마일까지 진격했던 골란 고원에서의 경험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

팬벨트가 계속 빠지던 지프에 몸을 싣고 나는 텔아비브의 정부 신문사가 있던 베이트 소콜로브에서 북쪽까지 이동했다. 목적지인 시리아 국경의 키부츠 가돗에 접근했을 때 대포 터지는 소리가 극심하게 커졌다. 거기에서 우리는 골란의 전투 지역으로 들어갔고, 맹렬한 전투 한 가운데로 던져졌다.

…내가 전쟁의 추억을 쓰고 있었을 때, 이곳 예루살렘에 사이렌 소리가 구슬프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2012년 11월 20일 오후 2시 15분이었다. 가자 분쟁이 격심해졌고, 하마스가 예루살렘에 로켓 한 발을 발포했다. 욤키프르 전쟁 이후 거의 4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평화라곤 없었다…

우리는 시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골란의 도시 쿠네이트라로 이동했다. 그 곳은 모슬렘, 드루지,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약 50,000명이 살고 있었다. 다마스커스의 외곽이 걸쳐 있는 원거리 지역에는 포병전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차량 한대가 전보대에 걸려 있었다.

우리 이스라엘 군인들은 신속하게 이 도시를 점령했고, 다마스커스로 막 진격할 순간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이 이루어졌고, 구네이트라는 유엔의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폐허로 남겨진 주택들에서 현재 바샤르 아사드의 아버지인 시리아의 하페즈 아사드 대통령의 초상화 포스터들을 여전히 볼 수 있었고, 시리아 저격수들은 흩어진 채 웅크리고 기다리고 있다.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다섯 곳에서 동시에 공격했다. 최대 규모의 탱크 전투가 골란 고원에서 발생했다. 불탄 러시아 탱크들과 지프 차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까맣게 탄 시신들을 목격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소름 끼쳤던 것은 팔이나 다리가 잘려 나간 시리아 군인들의 시신들이 나무에 체인으로 묶여 있는 것이었다. 시리아 군의 명령으로 행해진 것이라고 시리아인들에게서 들었다.

그들이 탈영하다가 잡혔기 때문이라고 했다. 종종 잘려나간 목이 죽은 시신 옆에 놓여 있기도 했다. 오늘날까지도 부패한 시신의 끔찍한 악취가 떠 오르곤 한다. 전시 시리아 사람들의 행동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오늘날 그들의 내전에서 보이는 잔인성에 그리 놀라지 않는다.

이스라엘 편의 골란 지역에는 드루지 마을인 부카타가 있었는데, 우리는 이스라엘에 의해 격추 된 러시안 수코이 수-7 전투기 안에 숨어서 두려움에 울고 있던 9살 소년의 옆을 지나갔었다.

그 소년은 머리에 ‘지하드를 위한 전사’라고 쓰여진 머리띠를 하고 군복을 입고 있었다. 이것은 하마스가 아이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지하드에 참여시키기 위해 기르는 것과 유사하다.

이스라엘의 총리였던 골다 메이르는 북부 전선 전시 상황을 듣기 위해 왔었다. 그녀 옆에는 국방부 장관 모세 다이안과 이스라엘군 북부 사령관이었던 이츠학 호피가 동석해 있었다.

이스라엘의 가장 거룩한 기도와 금식의 절기에 시작된 이 전쟁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12일 만에 끝이났고, 이스라엘, 시리아, 이집트 간 휴전이 101 km 마일 표석에서 협정되었다. ‘101’은 이스라엘을 위해 싸움에 선임되었던 천사장 미카엘의 숫자이기도 하다.

Picture - 전쟁 이야기들: 1973년 욤키프르 전쟁은 역사상 최대 탱크 전투들을 치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