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G12MVP 교육영역

1990년대 후반에 지에 교실에서 성공적으로 배우는 데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들였는지는 거의 상관없다는 내용이 실렸다. 반대로 더 많은 돈과 시간을 들였을 때 교육 효과가 떨어진다는 점을 알아냈다. 성공과 실패의 결정적 요인은 가르치는 방식이다. 부모의 지원이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은 전 세계의 교육자들도 동의하는 바다. 부모가 자녀의 교육에 관여하면 자녀는 더 많이 배운다. 말씀은 이 발견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자녀 교육에서 부모의 권위와 책임은 명확하다.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신 11:19-21)

성경에서 진리는 발견이 가능하고, 인식할 수 있으며, 적용할 때 계속 동일한 결과를 낸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진리 그 자체이시며, 삶 전반에 나타나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성경의 비밀은 우리가 아는 것과 하나님이 아시는 것의 차이에서 온 결과로, 우리가 깨닫기 어렵다. 하지만 지혜, 지식, 교육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배움을 장려하신다.
하나님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지식은 행함에서, 믿음은 하는 일에서, 배움은 성장에서, 지혜는 사랑에서 드러난다고 강조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 말씀에 드러난 정보뿐 아니라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아 가는 경험을 더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롬12:2) “모든 것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라고 기록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그는 마음으로 이해하며 방언으로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한 마음과 한 뜻”(행 4:32)으로 모였다.

바울은 로마인에게 ‘육신의 생각’을 경고하고 ‘영의 생각’을 품으라고 권고한다. 잠언 전체에서는 하나님께 삶의 지혜를 주신 데 감사하고, 평생 지혜를 추구하라고 말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라에 계시된 하나님의 방법을 연구하여 삶에 적용하라고 거듭 권면한다. 예수님은 열두 살에 이미 이러한 원칙에 정통하여 제사장들이 그 지혜에 놀랄 정도였다(눅 2:46-47 참고).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차이가 있다면, 바리새인은 율법을 인용했고 예수님은 이것을 이해하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히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셨다.

제자들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시며 그분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 묻고 배우라고 하신다.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세우신 원칙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축복이 돌아오는 것을 보라고 권면했다.

신약에 나타난 단어인 ‘회개’는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다.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를 번역하면 ‘생각을 바꾼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달라진 행동의 열쇠는 달라진 생각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행동에 초점을 맞출 때는 삶의 내용보다 외형에 치중하게 된다. 좋게 ‘보이지만’ 내면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외적인 부분이 아닌 우리 속사람이 어떠한지에 관심이 많으시다. 그분은 우리가 실재와 진리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그분을 닮아 가기를 원하신다.

고린도후서 10장에서 바울은 우리의 전쟁이 생각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3-5) 세상과의 전쟁은 생각의 전쟁이다. 우리가 세상에 굳건히 서서 영향력을 미치려면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처럼 행해야 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생각하신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

자녀는 태어나서 네 살이 될 때까지 주위 사람이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특히 부모의 관점은 중요하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자녀는 가정에서 본이 된 가치와 신념을 받아들인다. 자녀는 부모가 전해 준 실재를 믿으며 이를 따라 한다. 이러한 발달 단계에 있는 자녀는 다른 세계에 노출될 일이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부모는 자녀의 실제 가치 체계를 심어 주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거듭해서 부모라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함께 먹고, 걷고, 일하는 일상에서 삶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자녀에게 가르치는 것이 바로 부모의 역할이다.

말씀은 자녀의 삶에 미치는 부모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부모의 관점에 따라 자녀는 자신이 배우기에 충분히 똑똑하거나 너무 어리석다고 믿으며 학교에 들어간다. 또 자녀는 부모의 관점에 따라 학교생활을 할 것이다. 만약 부모가 숙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자녀는 숙제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즉, 부모의 관점과 태도에 따라 가정이 배움의 장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정에서부터 자녀는 어떤 사람에게 배울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겠다거나 누구에게도 배울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자녀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진리를 믿든지, 진리는 없다고 믿게 될 것이다.
왜 하나님은 다니엘이 어릴 때와 바벨론에 있을 때, 그토록 많은 시간을 훈련에 할애하셨을까?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서 타국인 포로로, 청소년기에 가족을 떠나 왕국에 들어가 왕을 섬긴다. 그들은 주술, 점성술과 다른 좋지 못한 주제를 연구하는 바벨론 대학에 들어가 최고의 성적을 거둔다.

그들은 이방인, 우상숭배의 문화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이에 젖어들지 않았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TV, 영화, 음악, 광고, 학교가 젊은이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다니엘과 친구들이 이러한 바벨론의 환경에 빠져들었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지켰다.

계속해서 주위의 가치와 자신이 배운 가치, 더 중요하게는 가정에서 배운 가치를 비교해 보았다. 말씀은 자녀가 주변 세계의 희생자가 된다면, 거기에는 설명할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그들은 가정에서 세상을 평가하는 기준을 배우지 못했고, 자신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진리를 알고 분별할 수 있다는 확신 또한 받지 못했다.

미국에서 더 큰 의미가 있는 다른 일이 발생했다. 교육 당국이 부모와 교사 중심이던 지역 기관을 국가 연합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가정에서 정부로 권한이 넘어간 것은 기도 모임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략적이고 위험하다. 본래 하나님은 자녀에 대한 권한을 정부가 아닌 부모에게 주셨다.

그분의 계획에 따르면, 국민을 다스리는 일이 정부의 권한이다. 물론 교육도 정부의 일에 포함되지만, 이는 특성상 개별 과정이다. 정부가 교육에 개입하면 가난, 약물 문제 같은 사회 현안처럼 고비용이 들지만 효과는 거의 보지 못할 것이다. 정부는 교육을 제도화하여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다루려 할 것이다. 마치 수감 제도처럼 말이다.

그러나 교육 문제는 개인 단위로 접근해야 효율적일 수 있다. 하나님은 개인을 다루려고 가정을 계획하셨다. 또 부모는 자신의 권한을 공교육제도에 위임할 수 있다. 그러나 권한을 위임받은 학교가 지원하기를 포기하거나 부모의 역할을 무시한다면, 아이들에 대한 법적 권한을 거의 잃게 될 것이다.

부모가 자녀 교육의 책임을 기독교 학교에 넘겨 버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자녀를 훈련하라는 책임을 교회에 부여하지 않으신다. 부모에게 그 책임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 문제도 부모와 가정에서 떠나 정부의 개입과 주도가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독교 교육이 바로서서 교회와 가정에 선한 영향력으로 말씀 위에 바로 선 가정과 교회의 거룩성 회복이 교육에 있어 가장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장헌일 박사/명지대학교 교수
국제정경리더십연구원 원장
국가조찬기도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