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옷감 세탁과 세제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막9:3)

베드로, 요한, 야고보 3명의 수제자 그룹만 데리고 변화산 정상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그곳에서 형용할 수 없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두 거장인 모세, 엘리야와 함께 나타나신 예수님의 영광스런 광채는 특별히 흰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저자 마가는 예수님이 입으신 흰옷을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더 이상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흰색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세탁업자의 직업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직업이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인들의 경우 많은 분들이 세탁소에서 시작해 어느 정도의 고생을 지나 자수성가해서 기반을 잡는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옷감, 다양한 세제, 다양한 세탁 기술이 없던 성서시대에 세탁업자들의 역할과 그들이 사용하던 세제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번 장에서는 성서시대의 옷감세탁과 세탁에 사용되던 세제에 대해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세탁업자, 발로 밟는 자

동일한 단어인 ‘세탁’을 사용하지만 성서시대의 세탁업자는 오늘날의 세탁소와는 하는 일이 약간 구별되었다. 베틀에서 막 짜여 나온 옷감은 뻣뻣하고, 보기에도 별로 매력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이런 옷감은 세탁자의 손을 거쳐 특별한 가공 단계를 거치게 된다. 세탁업자는 세마포 천을 수축시켜 유연하게 하고 양모 천을 충분히 두텁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 세탁자의 손을 거쳐 베틀에서 나온 원시적이고 투박한 옷감은 옷을 만들 수 있는 아름다운 천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세탁업자는 히브리어로 ‘코베스’라고 하는데, 이는 ‘발로 밟는 자’를 의미한다. 발로 밟는 자를 세탁업자로 지칭하게 된 것은 베틀에서 막 나온 원시적인 옷감을 물이 가득 채워진 욕조에 넣어 발로 밟아 묵은 때를 빼는 작업에서부터 세탁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사야와 아하스, 그리고 세탁자의 밭

옷감을 깨끗이 씻기 위해 발로 밟는 과정에는 다량의 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세탁 일은 샘과 같은 물 근원이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세탁 과정에서 사용하는 세제들의 불쾌한 냄새와 깨끗이 세탁한 천을 햇빛에 말리기 위한 넓은 들판의 필요로 인해 세탁일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성밖에서 이루어졌다.
흔히 ‘세탁자의 밭’으로 알려진 이곳은 이사야 선지자와 남유다의 아하스 왕이 만난 장소로도 유명하다.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이사야)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사7:3)
아하스 왕은 북이스라엘 왕인 베가와 아람 왕인 르신이 연합해서 남유다를 침공하려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을 의지하고자 했다. 하나님은 이런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 앗시리아가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권면하신 것이다.

아하스와 이사야가 만난 윗못 수도 끝에 있던 세탁자의 밭은 현재의 베데스다 못가 위치로 추정된다. 당시의 공격은 주로 포위공격이었고 성안에서 수비하는 자들은 장기간 버틸 곡식과 물이 가장 중요했다.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하나님을 의지해 결사항전할 것을 권면하려 했다면 윗못 수도의 세탁자의 밭은 좋은 만남의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북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포위 공격에 대비한 성안의 물공급 체계를 함께 고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하스와 이사야가 만난 세탁자의 밭은 한 세대가 지나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 왕 때에 다시 등장한다. 이미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앗시리아에 멸망하고 홀로 남은 유다를 정복하기 위해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산헤립은 전쟁사령관인 랍사게를 보내 동일한 장소인 윗못 수도구 곁의 세탁자의 밭에서 순순히 항복할 것을 종용했다.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게 하매 그가 세탁업자의 터의 대로 윗못 수도구 곁에 서매”(사36:2)

세탁에 사용하던 세제는?

오늘날과 같은 비누가 없던 성서시대에는 세탁을 위한 세제로서 무엇이 사용되었을까? 당시에 세제로 사용되던 ‘잿물’과 ‘비누’가 예레미야서 말씀에 함께 등장한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순수함을 잃어버린 신부’로 묘사하면서 잿물과 비누를 사용해 제 아무리 깨끗하게 씻더라도 죄악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네테르)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보리트)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렘2:22)
잿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네테르’인데 이것은 나트륨 화합물로 이루어진 광물질로서 물에 넣으면 거품을 낸다. 비누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보리트’로서, 이것은 염분이 있는 광야의 식물에서 추출된 식물성 알칼리 성분이다. 보리트는 아직도 광야에 거하는 베두인들이 비누 대용으로 사용하는 식물이다.

메시아의 날이 도래할 것을 예언한 선지자 말라기는 그 날을 ‘표백하는 자의 잿물’에 비유하고 있다.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말3:2)
옷감을 욕조에 넣어 발로 밟을 때 네테르와 보리트로 불리는 원시적인 세제를 넣어서 빨았다. 이 때 옷감에 베인 웬만한 묵은 때가 빠져나왔다. 이후 완벽한 탈색과 표백을 위해서 세마포 천과 면화 천은 햇빛에 말리고, 양모 천은 황산 연기를 가해 주었다.

장차 도래할 두렵고도 떨리는 메시아의 날에 누가 감히 그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어지간한 묵은 때를 빼내는 잿물처럼 강력한 엄위하심 앞에 누가 감히 자신의 숨겨진 얼룩과 죄악을 감출 수 있겠는가?

류모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