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겉옷 찢기와 권위의 손상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삼상24:4,5)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유대 광야로 도망가면서 기약 없는 방랑자의 신세가 되었다. 사무엘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지만, 다윗에게는 그때부터 더욱 혹독한 광야생활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울은 여전히 기세 등등하게 살아있었고,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음을 알게 된 그는 호시탐탐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다.

사울 왕을 피해 다윗이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쉬고 있을 때, 사울이 발을 가리우러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발을 가리운다’는 것은 ‘용변을 본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다윗의 추종자들은 즉시 하나님이 사울을 다윗의 손에 붙이신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은 그렇게 해석할만한 충분한 개연성이 있었다. 다윗은 그때 사울을 죽이기만 하면 기약 없는 방랑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화려하게 등극할 순간을 상당히 앞당길 수도 있었다.

추종자들이 모두 “다윗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라”며 부추길 때, 다윗은 추종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사울의 겉옷자락을 살짝 베는 것으로 만족했다. 당장 정적(政敵) 사울을 단 칼에 베어버릴 줄 알았던 추종자들은 다윗의 행동에 무척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후에 다윗이 보여준 행동이다.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을 벤 것만으로도 마음에 찔려 괴로워했던 것이다. 다윗은 사울을 죽인 것도 아닌데 왜 사울의 옷자락을 조금 벤 것만으로도 그렇게 마음에 찔려 괴로워한 것일까? 다윗은 진정 개미 한 마리도 쉽게 죽이지 못할 만큼 마음이 여린 ‘겁쟁이’요 ‘마마보이’였단 말인가?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에돔, 모압, 블레셋, 아람 등 주변국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가는 ‘용사’ 다윗의 모습을 볼 때, 다윗은 분명 마음이 여린 겁쟁이도 낭만적인 로맨티스트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다윗의 마음을 찔리게 했던 것일까? ‘겉옷자락을 베었다’는 다윗의 행동 속에 숨겨 있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옷단 술의 손상은 권위의 손상

다윗이 벤 사울의 ‘겉옷’은 성서시대에 단순한 옷이나 천 조각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성서시대에 남녀들이 걸치는 5종류의 옷 가운데, 겉옷은 그 네 귀퉁이에 달려있는 ‘술’(tassel)로 인해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겉옷에 달린 4개의 술은 그 사람의 종교적, 사회적 권위와 정체성이 집약된 곳이었다. 술은 4개가 한 쌍을 이루었는데, 그 중 하나라도 손상을 입으면 4개 전체를 바꾸어야 할 정도로 소중히 다루어졌다.

다윗은 엔게디 동굴에 들어와 용변을 보고 있던 사울에게 접근해 그의 겉옷자락을 살짝 베었는데, 그 부분은 다름 아닌 겉옷가에 있는 ‘옷단 술’이었을 것이다. 애써 4개의 술을 모두 자를 필요도 없었다. 하나만 잘라도 이미 그 겉옷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울의 몸에 아무런 해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사울의 겉옷에 있는 옷단 술 하나를 ‘싹뚝’ 베어버림으로써 왕으로서 사울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의 주권에 온전히 자신의 삶을 맡기던 다윗에게, 결코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의 권위를 손상시킨 자신의 행위로 인해, 다윗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윗은 왜 사울의 옷단 술을 벨 수밖에 없었을까?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한 다윗은 왜 사울의 옷단 술을 자르는 ‘심각한’ 행동을 한 것일까? 그것은 분명 흥분해 있는 추종자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피치 못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추종자들은 사울 왕의 최고의 정적인 다윗 편에 섬으로써 사울 왕의 ‘공공의 정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정치와 관련해서 예나 지금이나 통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누가 왕이 될지 모르는 정치적 격변기에는 더욱 그렇다. 자칫 줄을 잘못 섰다가는 역적이 되어 삼족이 몰살당하기도 하고, 운 좋게 줄을 잘 서면 역적도 충신이 되는 일이 가능한 것이 정치적 격변기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당시는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었지만, 사울의 왕권은 말기로 가면서 여기저기서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사울은 왕으로 등극할 초기에 비해서 주변의 대적들을 향한 인상적인 승리를 보여주지 못했고, 사무엘로부터 버림받고 다윗의 인기가 올라가면서부터는 심각한 우울증 증세마저 보이고 있었다. 사울 왕권의 말기는 블레셋과 주변의 대적들을 대항하는 일보다 자신의 정적인 다윗을 좇는 일에 더 혈안이 되었다. 실로 사사시대를 넘어 왕국시대로 넘어가던 이스라엘은 상당한 ‘정치적 혼란기’를 지나던 시기였다. 삼척동자도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사울의 왕권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임을 쉽게 예측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울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울 왕을 공식적으로 등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사울은 다윗의 도피를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놉에 있던 아히멜렉 대제사장과 85명의 제사장들을 모두 죽일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블레셋의 침략을 당하던 그일라 사람들 역시 다윗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결국 사울 왕의 보복이 두려워 다윗의 은신처를 알려주며 다윗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당시로서는 ‘사울 편에 서느냐, 다윗 편에 서느냐’의 문제는 곧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을 따르며 함께 도망자가 된 600명의 추종자들은 그야말로 다윗과 한 배를 탄 공동 운명체였다. 그들이 다윗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 다윗과 함께 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미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은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졌음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는 그 날, 도망자인 자신들의 인생도 180도 역전되리라는 기대도 많았을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정적인 사울이, 경호대장인 아브넬의 호위도 없이, 자신들이 은거하고 있던 동굴 속으로 용변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분명 속으로 쾌재를, 아니 ‘빙고’를 외쳤을 것이고, 다윗이 단칼에 사울을 베어버리도록 충동질했을 것이다.

순간 다윗은 자신이 쉽지 않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음을 느꼈다. 자신이 직접 칼로 죽이자니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렇다고 뒤로 꽁무니를 빼자니 흥분한 추종자들이 직접 사울을 죽일 수도 있는 살벌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결국 자기 손으로 사울 왕을 죽일 수는 없지만, 죽이는 것과 진배 없는 상징적이고 충격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흥분한 추종자들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러한 충격요법으로 행해진 것이 사울의 겉옷에 달린 옷단 술 4개 가운데 한 개를 싹뚝 베어버린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사울의 겉옷에 달린 옷단 술을 자른 다윗의 행동은 흥분한 추종자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누그러뜨릴 정도로 과감한 행동이었다. 만약 사울의 옷단 술을 자른 것이 대수롭지 않은 행동이었다면, 이 일 후에 다윗의 마음이 찔리고 괴로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을 것이다. 또한 흥분한 추종자들을 무마시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다윗이 만약 눈 앞에 찾아온 정적을 죽이지도 못하고 아무런 상징적 행위도 없이 슬쩍 뒤로 꽁무니를 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추종자들이 사울을 직접 죽였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들은 다윗이 일국의 왕으로서의 대범한 그릇이 되지 못하는 ‘새가슴’의 소유자 임을 확인하고 각자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겠는가…

사울은 왜 갑자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인정했을까?

다윗이 사울의 옷단 술을 자른 행위가 당시로서는 ‘범상치 않은’ 특별한 의미가 있음은 사울의 반응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숨어있던 엔게디의 동굴에 들어와 ‘항문에 힘을 쓰고’(?) 나간 사울에게 그의 겉옷자락의 옷단 술 하나가 자신의 손에 들려있음을 알려주었다.

사울은 자신의 겉옷에 달려 있어야 할 옷단 술 하나가 싹뚝 잘려 다윗의 손에 쥐어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모든 권위가 집약되어 있는 옷단 술이 다윗의 손에 들려 있다는 것은, 바로 다윗이 차기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임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울 자신도 이런 사실을 고백하고, 후일에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자신과 후손들에게 선대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사울의 옷단 술이 찢겨길 것을 예언한 사무엘

사울의 겉옷자락에 달린 옷단 술 하나를 찢어서 다윗이 갖게 되는 상징적인 행동은 이미 사무엘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도 나타난 바 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기름부은 선지자였지만, 또한 왕으로서의 사울을 버린 선지자이기도 했다.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눈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취사선택해서 나름대로 순종했다.

이런 사울의 행동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고, 결국 사무엘은 자신이 기름 부은 왕을 다시 폐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괴로운 밤을 보내야 했다.왕으로서 사울은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고 이런 사실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분명하게 선포되었다.

사무엘의 최종 선고를 들은 사울 왕은 거의 혼비백산, 기절초풍의 지경이 되었다. 사울은 즉시 잘못을 인정했고 자신의 행동을 그럴듯하게 변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사울은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 주시도록 사무엘의 겉옷자락을 붙잡고 간청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단호하게 이를 뿌리쳤고, 결국 선지자 사무엘의 겉옷자락에 있는 옷단 술 하나가 찢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장면은 ‘이수일과 심순애’의 신파극에 나오는 ‘놓아라, 바지 끈 찢어진다’는 대사를 연상하게 하지만, 이 부분 역시 겉옷의 옷단 술과 관련된 것이다.

선지자로서 자신의 권위가 집약된 옷단 술을 찢긴 사무엘은, 사울을 향해 하나님이 사울을 버렸음을 재확증하며 선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의 옷단 술을 찢은 사울의 행동과 관련해서 이를 표현하고 있다.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삼상15:28)

여기서 왕에게서 ‘떼어서’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카라’를 쓰고 있는데, 이는 ‘찢는다’는 의미를 갖는 동사이다. 결국 사울의 옷단 술을 ‘찢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 즉 사울의 사위이기도 한 다윗에게 옷단 술을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울 왕의 옷단 술 한 개가 찢겨져 다윗의 손에 들려있으니, 사울 왕이 기절초풍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울은 자신의 옷단 술이 찢겨져 다윗의 손에 들린 것을 본 순간, 사무엘 선지자의 선포가 다시 한 번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을 것이다.

겉옷을 찢어서 왕국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는 선지자 아히야의 행동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멈추지 않는 솔로몬 왕에 대한 징계를 위해 그의 왕국에서 10개의 지파를 떼어 여로보암에게 주시고자 했다. 실로(Siloh) 출신의 선지자인 아히야는 같은 요셉 지파 출신인 여로보암을 길에서 만나 자신의 겉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 그 중 열 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주었다. 이로써 솔로몬 왕국의 분열을 강력히 암시한 것이다.

반면, 자신이 직접 겉옷의 일부를 찢는 행위는 ‘크리아’라고 하는데, 이는 조문과 슬픔의 표시로서 행해진 것이다.

류모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