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겉옷과 계명의 아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9:20,21)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가를 만지고 고침 받은 이야기는 많은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는 말씀이다. 성서시대에 사회적 약자로서 소외 받던 여인에 대한 심리적인 동정과 함께 예수님의 겉옷가를 살짝 만지는 독특한 행위와 그에 대한 믿음의 보상으로 만성적인 불치병을 고침받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여인의 독특한 믿음을 가리켜 ‘저스트 원터치’(Just One Touch) 믿음으로 부르기도 한다. 모든 것이 한 번의 ‘버튼 터치’만으로 이루어지는 편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원 터치’ 믿음은 특별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부정한 혈루증 환자라는 당시의 사회적 편견을 뚫고 무리 앞에 나타나 예수님의 겉옷가에 손을 댄 여인의 믿음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버튼 하나만 눌러댄’ 단순하고 가벼운 행동이 아니었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가에 손을 댄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행동일까? 이 여인은 어떻게 겉옷가에 손을 대는 행위만으로도 자신의 혈루증 근원이 마를 수 있다는 믿음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일까?

겉옷과 하나님의 계명

유대인들에게 겉옷이 특별하고 소중한 이유는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달려있는 ‘술’ 때문이다. 하나님은 율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겉옷가에 술을 만들도록 지시했는데, 이 술을 보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살아가는 ‘계명의 아들’임을 기억하도록 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민15:38-40)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과 경건성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옷단 술을 이용했다. 술을 길게 늘어뜨림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계명에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순종하고 있음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경문’은 기도할 때 이마에 차는 성구함을 가리킨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마23:50)때로는 술을 너무 길게 늘어뜨려 땅에 질질 끌려서 뒤에 오는 사람에게 밟히는 경우도 있었다. 서기관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바로 이 옷단 술을 길게 늘어뜨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눅20:46)

예수님은 기도할 때 ‘경문’을 차고 ‘옷단 술’을 착용하는 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기 때문이다. 단지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자신의 종교적 열심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경문을 남보다 크게 하고 술을 길게 늘어뜨리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행동이었다.

1세기에 이스라엘 땅에서 사역하셨던 예수님도 기도할 때 경문을 차고 겉옷에는 술이 달려있었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보고 바로 유대인으로 알아보았는데 이는 예수님의 복장이 1세기 유대인들의 복장과 같았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요4:9)하지만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영화나 기독교 성화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겉옷에 달려있어야 할 ‘술’과 기도할 때 이마에 차야 할 ‘경문’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들이 보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보여준다면, 여인은 분명 예수님이 ‘유대인’임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2000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 사역하셨던 역사적 예수는 분명 ‘유대인 예수’였지만 오늘날 우리가 믿는 예수는 로마, 영국, 미국을 거쳐 서구화된 예수의 모습일는지 모른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10:30)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도 옷과 관련된 배경을 통해 살펴본다면 의미가 새롭게 와 닿을 것이다.

비유에 나오는 강도 만난 자는 강도에 의해 옷이 완전히 벗겨졌고 너무 맞아 반 죽음 상태에 이르렀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통해 사회적 신분과 출신을 알아볼 수 있었지만, 이 사람은 나체 상태로 발견되어 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신상명세 정보를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옷 외에도 말하는 액센트를 통해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이 사람은 반 죽음 상태에서 발견되어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레위기에 나오는 의식적 정결법에 갇혀 있던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는 아무런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강도 만난 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칫 부정한 사람과의 접촉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옷단 술 만지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왜 예수님의 겉옷가에 손을 댄 것일까?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는 순간 특별한 전기가 ‘지지지’하고 통해서 병이 낫게 될 것을 기대한 것일까?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여인의 행동을 본다면 이런 엉뚱하고 황당한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진 것은 단지 겉옷의 아무 곳을 만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인은 바로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달려있는 ‘옷단 술’을 건드린 것이다. 옷단 술이 유대인들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를 알 때 여인의 기이한 행동에 숨겨있는 믿음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 당시 1세기의 랍비 문헌에는 이런 말이 있다.“온전하지 않은 자가 온전한 자의 옷단 술에 손을 대면 온전해진다.”이러한 1세기 유대인들의 믿음은 혈루증 여인뿐 아니라 다른 무리들의 행동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고 손을 대는 자마다 모두 나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市場)에 두고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막6:56)

겉옷에 달려 있는 옷단 술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의미하는 영적인 상징물이다. 마치 오늘날의 성도들이 ‘십자가’의 조형물을 보여주면 마귀가 도망간다고 말하듯이, 성서시대 유대인들에게는 겉옷의 옷단 술은 그런 영적인 에너지와 파워가 집약된 곳이었다

.랍비 문헌에서 말하는 ‘온전한 자’는 하나님과 특별하고도 친밀한 영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다. 즉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사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장애가 없는 ‘의인’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1세기 이스라엘 땅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랍비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살리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이런 예수님의 옷단 술에 손을 대는 행위야 말로 질병에서 나음 받기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와 모험이 아니겠는가!하지만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오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몇 개의 장애물이 있었다.

첫째, 자신을 부정한 자로 보는 뭇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율법은 여인의 생리기간의 유출을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고 있다.“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칠 일 동안 불결하니 무릇 그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레15:19)

혈루증 여인과 같이 정상적인 생리기간이 아닌데도 피의 유출이 있으면 유출 기간 내내 부정하게 인식되었다. 결국 여인은 혈루증이 완치되기까지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 격리된 상태로 살아야 했다.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 불결기 외에 있어서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불결기를 지나든지 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날 동안은 무릇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레15:25)

둘째, 자신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죄의식이었다. 피의 유출이 있는 여인은 자신이 닿는 물건과 사람을 모두 부정하게 만들었다.

“무릇 그 유출이 있는 날 동안에 그의 눕는 침상은 그에게 불결한 때의 침상과 같고 무릇 그의 앉는 자리도 부정함이 불결의 부정과 같으니 이런 것을 만지는 자는 무릇 부정한즉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레15:26,27)

혈루증 여인이 무리에 둘러싸여 있는 예수님의 겉옷가에 손을 대기 위해서는 무리를 뚫고 나와야 했고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부정하게 해야 했다. 간신히 무리를 밀치고 몰래 예수님의 겉옷가에 손을 댔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온전하신 예수님도 여인으로 인해 부정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인은 이런 장애물들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고 나아왔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겉옷가에 손을 댔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의 혈루의 근원이 마른 것을 체험했다. 순간 환호성을 지를 뻔하던 자신의 입을 간신히 틀어막고 조용히 몰래 현장을 빠져나가려던 여인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봉착했다. 무리에 둘러싸여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침을 당하시던 예수님이 여인의 행동을 눈치챈 것이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막5:30)

여인이 계획하던 ‘치기 빠지기’(hit and run) 전략은 난관에 부딪쳤다. 여인은 결국 무리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부정한 여인이라는 수치심과 많은 사람을 부정하게 했다는 죄의식 가운데 군중 앞에 노출되어야 할 순간이 된 것이다.

여인이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군중들의 눈길이 예수님의 입에 쏠렸다. 예수님은 과연 여인을 어떻게 벌을 줄 것인가? 여인은 허락도 없이 함부로 옷단 술을 만짐으로써 예수님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1세기 당시의 랍비 문헌은 남의 옷단 술을 함부로 만질 경우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옷단 술을 만지고도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옷단 술 소유자의 자녀들이었다. 자녀들은 아버지 겉옷의 옷단 술을 만져도 아무런 법적인 저촉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연륜과 지혜의 상징인 할아버지의 수염을 지나가는 행인이 함부로 만지면 모욕이 되지만, 손주들이 만지면 용납되는 것과 같았다.

군중들의 모든 관심이 예수님의 입에 쏠려 있을 때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놀라운 선포를 하셨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딸’로 부르신 것이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5:34)

예수님이 군중들 앞에서 여인을 자신의 ‘딸’로 선포한 순간, 여인은 더 이상 죄의식으로 고통 할 필요가 없었다. 옷단 술의 주인인 예수님이 여인을 자신의 딸로 선포함으로써 더 이상 처벌의 대상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인의 혈루증만 치료한 데서 만족하신 것이 아니라, 여인의 마음 가운데 있는 수치심과 죄의식까지 씻어주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류모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