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유대인 절기로 이해하는 성경

초막절과 이른 비의 기도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7:37,38)

‘명절 끝날’ 목청을 높여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설파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친숙한 요한복음 가운데에서도 무척이나 인상적인 부분이다.

일단 광야와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삶이 만족 줄 것을 찾아 헤매는 ‘목마름’의 연속인데, 단순히 갈증 난 목만 적셔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친다는 다소 과장법적인 선포가 듣는 이에게 영적인 카타르시스와 위로를 안겨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씀을 그냥 말씀이 주는 느낌만으로 은혜를 받을 수도 있지만, 이 말씀이 선포된 당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면 문화가 다른 한국 성도들이 도저히 캐치해 낼 수 없는 영혼 깊은 곳을 적셔주는 ‘생수’와 같은 은혜를 맛볼 수 있다.

명절 끝날은 어떤 날일까?

요한복음은 유대인들의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신 예수님의 기록을 충실하게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공관복음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마지막 유월절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만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이는 다분히 요한복음 저자의 특별한 의도가 담긴 것이다.

절기에 따른 예루살렘 방문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곳곳은 각각의 사건이 있었던 절기, 즉 시간적 배경에 대해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무심코 놓치는 부분이기도 하다.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이 ‘생수의 강’ 설교를 하신 날은 ‘명절 끝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명절은 유월절과 함께 유대인들에게 또 다른 축을 차지하는 초막절을 가리킨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요7:2)유월절과 마찬가지로 7일간 지켜지던 초막절은 마지막 날, 즉 ‘명절 끝날’ 성전에 있는 제사장의 뜰에서 독특한 행사를 했다.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는 제사장의 뜰은 직무를 맡은 제사장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거룩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초막절 행사가 열리는 1주일 동안만큼은 예외였다.

버드나무와 호산나

초막절의 1주일 동안 제사장의 뜰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순례객들이 모두 참여하는 두 가지의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첫째, 물을 붓는 관제(libation) 의식이다. 초막절이 시작되면 대제사장은 순례객 행렬과 함께 실로암 연못에 가서 물을 길어 왔다. 이 물을 들고 수문(water gate)을 통해 제사장의 뜰로 들어갔는데 대제사장을 따르던 순례객들도 함께 들어갈 수 있었다.

실로암 연못에서 떠온 생수는 번제단 위에서 붓는 의식, 즉 ‘관제’를 행했는데 일반적인 제사에서 포도주를 붓는 것과 달리, 초막절에는 포도주와 물을 함께 붓는 독특한 관제의식을 행했던 것이다. 이것은 초막절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내려야 할 이른 비의 축복을 간구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실로암 연못에서 생수를 떠오는 행렬이 수문을 통해 제사장의 뜰에 들어올 때 제사장들은 은나팔을 불며 이사야서 말씀으로 지어진 찬양을 불렀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2,3)

둘째, 번제단 남서쪽에 버드나무 가지를 세우고 기도문을 낭송하는 의식이다. 이 버드나무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모짜라는 마을의 시냇가에서 꺾어온 것을 사용했다. 매일 모짜에서 꺾어온 새로운 버드나무 가지를 사용했는데, 물이 없으면 곧 말라 비틀어지는 버드나무를 번제단 남서쪽에 세워놓고 그 주위를 한 바퀴씩 돌면서 순례객들은 시편 118:25 말씀의 기도문을 함께 목청껏 낭송했다.“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시118:25)

이 기도문에 두 번 반복되는 ‘여호와여 구하옵나니’를 히브리어로 ‘호쉬아 나’라고 하는데,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호산나’ 찬양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소서’로 번역되는 호산나는 매일 제단 남서쪽에 세워진 버드나무 가지를 가리키는 별칭이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물 근원이 있는 시냇가에서 꺾여 나와 번제단 옆에서 말라 비틀어져 가는 버드나무를 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갈구하는 ‘호산나’의 외침을 들었을 것이다. 물이 없어 죽어가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물이 없으면 풍성한 올해의 수확 가운데에서도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곳이 광야 이스라엘이다.

성서시대 유대인들은 실로암 연못에서 떠 온 생수를 제단 위에서 붓고 그 옆에서 말라 비틀어져 가는 버드나무 가지 주위를 돌면서 다음 한 해의 풍년을 기약한 풍성한 이른 비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벳바게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당시의 순례객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친 것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구원을 갈망하며, 초막절 행사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 사상을 결부시킨 것이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12:12,13)

번제단 주위를 도는 순례객들의 손에는 초막절에 흔드는 4가지 식물들인 ‘아르바 미님’이 쥐어 있었다. 평소에는 제사장에게만 오픈 된 공간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과 여인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들어와 이 행사에 동참했다. 가족 단위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 난생 처음 거룩한 장소인 제사장의 뜰에 들어와 번제단 주위를 도는 순례객들의 흥분과 감격이 느껴지는가?

예수님은 왜 목청을 높여 외쳐서 말씀하셨을까?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요7:37)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생수의 강’ 설교를 하실 때 목청을 높여 ‘외쳐서’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왜 목청을 높여 외쳐서 말씀하셨을까?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백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목청이 올라간 것일까? 아니면 특별히 선포할 메시지가 너무 중요해서 강조하려고 그러신 걸까? 예수님이 ‘생수의 강’ 설교를 하신 명절 끝날, 제사장의 뜰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알지 못하면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명절 끝날’, 즉 초막절 마지막 날을 유대인들은 ‘호산나 라바’라고 불렀다. 이 날은 다른 날과 달리 ‘큰 날’, 즉 ‘큰 구원의 날’(호산나 라바)로 불렸는데, 번제단 옆에 버드나무를 세워놓고 매일 한 바퀴씩 돌며 하던 행사를 마지막 날은 7바퀴를 돌면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을 따라 번제단을 7바퀴 돌면서 ‘호산나’ 기도문인 시118:25절을 목청껏 외쳐대면서 이른 비를 간구하는 일종의 ‘기우제’는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주변에서는 은나팔을 불어대는 제사장 찬양대의 소리가 들렸고, 제사장의 뜰 바닥에 버드나무 가지를 치면서 버드나무 잎을 모두 떨어뜨리는 독특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야말로 왁자지껄한 시장 바닥의 분위기가 아닌가? 이런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은 유명한 ‘생수의 강’ 설교를 하셔야 했던 것이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더욱 목청을 높여 외쳐서 말하지 않는다면 이들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목청을 높여 외쳐서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바로 옆에 서 있는데도 그 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예루살렘 순례객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담긴 또 다른 절규의 함성이었던 것이다.

열방에 대한 심판, 그리고 구원에 대한 최종적 완성

유월절로 시작해 1년의 농사적 절기의 마지막 때에 있는 초막절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완성되는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스가랴 선지자는 열방이 심판을 받고 그 중에 남은 자, 즉 구원 얻은 자들이 초막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올 것이라는 환상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구속사가 완성되는 말일의 때에 이루어질 일이다.“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 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 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슥14:16-21)

초막절에 숨겨진 구속사적 의미는 초막절에 드려지는 희생제물들 속에도 감취어져 있다. 7일 동안 모두 70마리의 황소가 번제로 드려지는데, 이는 창세기 10장에 열거된 70개의 열방을 상징하며, 하늘의 축복이 온 열방에 미치도록 기도하는 의미가 있다. 이는 말일의 때에 열방이 회복될 것에 대한 상징을 담고 있다.

초막절 첫날 13마리 황소로 시작해 매일 1마리씩 줄어들면서 7일 동안 번제를 드리게 되는데, 이를 모두 합치면 70마리 황소의 번제가 되는 것이다(13+12+11+10+9+8+7=70).

초막절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의미하는 ‘7’의 숫자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특별한 절기이기도 하다. 초막절은 유대력으로 ‘7번째’ 달인 티슈레이 월 15일부터 시작해 ‘7’일 동안 지킨다.

또 70마리 황소와 함께 14마리 수양, 98마리 양, 그리고 336개의 소제가 7일 동안 드려지는데 이는 모두 7의 배수이다(7*10=70, 7*2=14, 7*14=98, 7*48=336). 초막절 희생제물의 숫자에 계약의 숫자인 ‘7’이 반복되는 것은 상당히 의도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인 ‘구속사’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절기로서의 초막절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메시아 왕국에 대한 그림자로서 등장하는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지상통치를 통해서도 초막절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다윗 왕조의 최고 절정으로 묘사된 솔로몬 통치기에 성전 봉헌식이 드려진 날 역시 초막절이기 때문이다.“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 월 곧 칠월 절기에 솔로몬왕에게 모이고”(왕상8:2)

류모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