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성경시대 풍습으로 이해하는 성경 - 겉옷과 크레디트 카드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마24:18)

마태복음 24장은 십자가의 죽음을 며칠 앞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위에 앉아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마지막 심판의 때에 일어날 상황들을 기록하고 있다.“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종말의 때에 일어날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 주셨다. 그런데 이 가운데 우리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곳이 ‘겉옷’과 관련된 부분이다. 대부분이 농사 일을 하던 성서시대의 농부들은 속옷만 입고 편하게 농사 일을 했다. 예수님은 심판의 날에 밭에서 일하는 자들은 ‘겉옷’을 가지러 집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다.

겉옷이 과연 심판의 때에 대부분의 농부들이 집안에 들어가서 챙기려고 했던 귀중품이라도 된다는 말인가?예를 들어, 해마다 여름이면 오랜 장마로 인해 수해를 입는 지역민들을 생각해 보자. 급류로 인해 집이 쓸려 내려간다고 할 때 수해민들은 급히 집안에 들어가 가장 귀한 물건 몇가지만 챙겨가지고 나올 것이다. 혹시 장롱 깊숙한 곳에 숨겨둔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라도 있으면 일순위로 챙길 것이다. 그러면 과연 성서시대 농부들에게는 심판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집안에 들어가 일순위로 챙겨나오는 물건이 겉옷이었단 말인가? 성서시대 농부들에게 겉옷이 주는 의미를 모르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겉옷은 ‘입는 옷’이 아니라 ‘덮는 옷’

우리 말 성경에 ‘겉옷’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에 ‘케쑤트’, ‘씸라’, ‘메일’, ‘아데레트’ 등 다양한 단어로 등장한다. 각각의 다양한 차이들이 있겠지만 역사적 자료가 빈약한 상황에서 각각의 미묘한 차이들을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단어들은 모두 ‘겉옷’이라는 한 개의 단어로 번역되어도 충분할 만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 몸의 가장 바깥에 걸치고, 더 나아가 ‘덮는 옷’이라는 것이다. 옷을 ‘입는다’고 표현해야 하는데, 겉옷의 경우는 ‘덮는다’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린다.

성서시대의 겉옷은 덮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다. ‘덮는다’는 표현은 옷이 아니라 ‘이불’에 사용해야 하는데, 이는 성서시대의 겉옷이 옷과 이불의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겉옷의 모양을 보더라도, 비록 옷으로 불리지만 정사각형의 천 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언뜻 보면 이불처럼 보일 수도 있다.집 근처에서 일을 하고 외출할 경우에는 속옷만 입고 다녔지만, 멀리 여행을 할 경우는 겉옷을 걸쳤다. 이 겉옷은 장기간의 여행에서 낮에는 더위와 비를 막아주고, 밤에는 길거리에서 노숙을 해야 하는 성서시대 여행객들에게 슬리핑 백(sleeping bag) 역할을 했다. 겉옷을 이불처럼 덮고 잠을 잤던 것이다.

포도주를 마시고 나체 바람으로 잠을 자고 있던 노아의 하체를 두 아들 셈과 야벳이 옷으로 덮어주었는데, 이 옷은 겉옷인 ‘씸라’였다.“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창9:23)

시어머니 나오미의 지시대로 룻은 보아스가 덮고 있는 겉옷 속으로 들어갔다. 자다가 함께 누워있는 룻을 발견한 보아스는 화들짝 놀랐다. 이 때 룻은 “나를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으소서”라고 간청하고 있다.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3:9)

‘옷자락으로 덮는다’는 것은 ‘겉옷으로 덮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겉옷과 관련된 독특한 표현이다. 남자의 펼쳐진 겉옷 속으로 여인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 남자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보아스와의 결혼을 의미하는 룻의 완곡한 청혼인 것이다. 집안의 가장은 겉옷을 펼치고 그의 보호 아래 들어온 가족들을 모두 책임져야 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이사야 서에도 등장한다.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사54:2)현대 이스라엘의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의 예배에 참석해 보면 겉옷을 펼쳐서 가족들을 보호하는 의미를 갖는 독특한 예식을 볼 수 있다. 예배 도중에 ‘하잔’으로 불리는 ‘찬양 인도자’가 민6:24-26에 나오는 제사장의 축복을 웅장하게 낭송한다.“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6:24-26)

이 때 예배에 참석한 집안의 가장들은 그들의 어깨에 걸치고 있는 기도숄을 펼친다. 히브리어로 ‘탈릿’으로 불리는 기도숄은 성서시대의 겉옷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현대화된 의상이다. 하잔이 낭송하는 제사장의 축복문과 함께 가장은 탈릿을 펼치고 아내는 그 탈릿 속으로 들어가 가장의 보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서시대에는 모두 단벌신사(?)

겉옷은 세마포로 만드는 속옷과 달리 주로 양털로 만들어졌다. 소매가 긴 속옷과 달리 겉옷은 소매가 없거나 있어도 무척 짧았다. 성서시대 대부분의 농부들은 단 한 벌만의 겉옷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표현을 빌리자면 성서시대에는 모두 ‘단벌신사’였던 것이다.

성서시대 농부들에게 한 벌뿐인 겉옷은 현대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최후의 수단으로 겉옷을 전당 잡혀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이것은 겉옷 자체가 특별히 비싼 옷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달려있는 ‘술’ 때문에 생긴 풍습이다. 히브리어로 ‘찌찌트’라 불리는 ‘술’은 ‘기다란 실’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겉옷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어 하나님의 계명을 좇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야 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민15:38-40)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달려 있는 술의 매듭은 사람마다 모두 달랐는데, 이 술의 매듭을 진흙 토판에 찍어서 자국을 남긴 후 돈과 양식을 빌릴 수 있었다. 오늘날 표현으로 한다면 크레디트 카드나 인감 도장에 해당할 것이다. 여러 개의 크레디트 카드를 만들어 ‘돌려 막기’를 하는 것이 현대의 과도한 소비문화이지만, 성서시대에는 단 벌의 겉옷으로 1회에 한정해서 마지막 수단으로 쓸 수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산업혁명으로 잉여생산물을 쌓아두면서 살고 있는 현대사회와 달리 성서시대는 모든 재화와 상품이 한정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족함 가운데 살아야 했다.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겉옷을 전당 잡혀서 목숨을 연명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율법은 겉옷을 전당 잡은 경우라 할지라도 해가 지기 전에는 반드시 돌려주도록 명령하고 있다. 이 겉옷이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자칫 추위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출22:26,27)

“그가 가난한 자여든 너는 그의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질 때에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신24:12,13)

가난한 자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며 부를 축적하는 사마리아의 부자들을 향해 아모스 선지자는 그들의 죄악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이들은 전당 잡은 겉옷을 가난한 자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신이 덮고 잠을 잠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다.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암2:8)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상황에서 마지막 수단으로 전당 잡히는 물건이 겉옷이라고 볼 때, 이 땅에서의 최후의 밤을 보내신 겟세마네 기도 현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눅22:36)

곧 자신을 체포하러 들이닥칠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로마 군병들로 인해 예수님은 겉옷을 팔아 검을 사도록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력 봉기를 선동하신 것이 아니다.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당시의 상황이 그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주지시키려 했던 것이다. 자신을 체포하러 온 당국자들에 대항해 수제자 베드로가 칼을 꺼내 들자 이를 적극적으로 말리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18:10,11)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지켜야 할 새로운 계명을 주셨다.

율법은 겉옷을 전당잡지 못하도록 명령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송사하며 속옷을 가져가려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명령하셨다. 겉옷이 갖는 성서시대의 의미를 알 때, 겉옷까지 아낌없이 주라는 산상수훈 말씀은 모세의 율법을 훨씬 초월하는 수준 높은 삶을 제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5:40)

류모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