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탈무드의 지혜교육, 그 원천을 찾아서 ...

미쉬나의 배를 타고 탈무드의 바다로

히브리어 원문: Mishnah Moed Shabbat 31a/한글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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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어떤 이방인이 랍비 샴마이에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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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기를 “ 내가 한 다리를 들고 있을 때 토라의 전부를 나에게 가르치는 조건으로 나를 개종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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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 샴마이는 그를 그의 손에 있던 건축자의 도구로 그 이방인을 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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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랍비 힐렐에게 왔다.

힐렐은 그에게 말했다. “너가 싫어하는 것을 이웃에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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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토라의 전부이고, 그 나머지는 주석이니라. 가서 이것을 배워라.”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미쉬나는 랍비들의 토론으로 이루어진 길고 장황한 어록들인 게마라를 제외한 부분이다. 그러나 게마라 부분도 미쉬나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함께 연구하고 살펴보는 것이 사실 정석이다. 토라에 대한 랍비들의 토론을 성문화한 미쉬나가 A.D 200 년경에 완결된 이유는 토라의 권위에 대한 도전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쉬나와 게마라가 쓰여진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토라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개별적으로 토라를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랍비들이 이들을 모아 문서화시켜서 이 자료들을 후대에게 전수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랍비들의 개별적인 사견들이 난무하고 미쉬나의 양이 불필요하게 많아졌고, 급기야 토라의 권위조차 흔들리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됐던 것이다. 또한, A.D 600여 년경에 게마라도 이런 토라의 권위에 대한 도전의 문제로 완결된 경전화가 이루어졌다.

결국 미쉬나와 게마라는 토라의 해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매우 동질성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미쉬나와 게마라의 연관성을 가지고 전체 본문을 다루는 일은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기에 불가능하겠지만, 미쉬나와 함께 게마라의 본문에서 다시 토론되고 이야기된 랍비들의 이야기들은 때때로 참고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바벨론 탈무드에서 등장하는 세데르 모에드(Seder Moed)의 논문들 중 “샤밧”(Shabbat 31a)에 기록된 한 이야기 식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31a 라는 숫자를 붙이는 의미는 이 “샤밧”이라는 주제를 논하는 논문이 장수가 모두 31장의 분량이라는 의미이고, 그 중에 좌우 두 페이지를 한 장으로 할 때, 첫 번째 장에 해당한다는 의미에서 a 라고 붙인다. 혹시나, 탈무드 원문을 보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탈무드의 기본적인 숫자와 영문 및 기타 기호들의 표기법들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라 하겠다.

이 본문은 사실 영문 번역을 통해 널리 회자되어진 본문이기도 하다. 그냥 보면, 이 본문은 이해하기 쉬운 매우 짧고 독립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이 본문은 “수기옷”(sugyot)이라 부르는 전체의 주제를 이어나가는 긴 이야기 중 한 부분(passage)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탈무드는 하나의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매우 복잡하고도 긴밀하게 서로 앞뒤 단락들이 문맥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탈무드의 편집자들은 복잡하고 긴 토론과 논쟁의 형태 속에서 형성된 여러 독립적이고 분리된 단위의 분문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탈무드를 연구하는 많은 현대 학자들조차 긴 탈무드의 전체적인 맥락을 다루기가 어려워, 간략하게 단락단락 한 부분씩 발췌하여 번역 작업을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긴 탈무드의 전체적인 맥락은 무시한 채, 한 단락씩 발췌하여 이솝우화와 같은 탈무드로 번역한 것이다. 이런 영향 때문에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탈무드가 짧은 이솝우화와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물론, 그것도 탈무드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한 부분씩 발췌된 이솝우화와 같은 이야기들은 반드시 본문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탈무드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토론의 주제들과 연결되어 이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이런 탈무드의 성격에 대한 이해 속에서 탈무드 본문을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필자가 집중해서 설명하고 있는 탈무드의 가장 일차적인 본문인 미쉬나 자체의 표현 스타일은 매우 간결하고 생략적이다. 하지만, 이 미쉬나의 본문은 종종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이 탈무드 전체를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본문의 진정한 단어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본문의 흐름과 그 맥락을 잘 이해함으로써 미쉬나 자체가 드러내고자 하는 그 깊은 의도를 이해하고 해석하기를 훈련한다면, 미쉬나가 점점 친숙해지고 쉬워질 것이다. 그래서, 그 명확한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그 비어있는 괄호와 행간에 단어와 구를 추가하여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본문의 내용인즉슨, 기원전 35년 무렵, 즉 예수님 시대 전후로 랍비 힐렐과 샴마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두 미쉬나 학파에 대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힐렐과 샴마이 학파가 다양한 토론과 논쟁을 하면서 특히 “샤밧”(안식일)에 대한 토론 중에, 이방인들이 토라를 배우는 것에 대한 주제가 등장하는데, 그 이야기 중 한 단락에 해당된다.

샴마이 앞에 온 이방인에 대한 다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자, 그럼 본문을 보자. 우리는 이 본문에 대해 힐렐과 샴마이라는 1세기 당시에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의 두 큰 지도자들을 보고 있다. 그들은 매우 다른 개성들과 철학들을 가지고 토라를 각각 다르게 해석하고 가르쳤음을 보게 된다. 이 본문은 바로 두 학파 사이에 두드러진 차이들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 미쉬나를 통해 샴마이는 거만함으로 이방인들의 도전을 이해하는 것 같다. 샴마이는 그의 손에 있었던 건축자들의 줄 재는 도구로 이방인을 쫓아내버렸다. 이방인의 말은 오늘날의 말로 풀어보면, “자, 유대교의 기초에 대해 25 자 안에서 나에게 설명해 보시오.

그리고, 나를 설득해서 유대인이 되게 해 보시오”와 같은 말이다. 이 이방인의 요구가 상당히 무례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샴마이의 입장에서는 그 유대교의 전통에 대해 존경하지 않는 말과 태도를 가진 건방진 이방인들에 대해 일고의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힐렐은 이러한 도전적이고 거만한 이방인들의 도전을 하나의 기회로 보고, 그 이방인들의 질문을 유대교의 기본에 대해 배우기를 원하는 하나의 진지한 질문과 요청으로써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힐렐의 대답은 바로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황금률 설교(마 7: 1-12)와 일맥 상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힐렐의 시대가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50여 년 전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유대교에서도 참된 진리를 추구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의 한 흐름 속에 있는 교훈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본문과 같이 이방인들에게 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외식적인 전통으로 무거운 짐을 지우고, 이방인을 경멸하면서 진실함과 감사함 없이 허울만 있는 신앙을 따라 가도록 가르쳤던 샴마이와 같은 냉혹한 지도자들도 있었던 반면, 토라의 진리와 그 율법의 참된 의미와 참된 신앙의 원리를 깨닫고,

첫째 계명인 쉐마의 계명 즉 신명기 6장 4-5절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와 둘째 계명인 레위기 19장 8절에 언급된 “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진실로 실천하고자 했던 힐렐과 같은 참 하나님의 백성들에 가까운 유대인들도 존재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이 토라의 전부이고, 그 나머지는 주석이니라. 가서 이것을 배워라”는 힐렐의 말도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라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이 힐렐의 말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발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 간단한 황금률의 가르침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 가서 열심히 토라와 탈무드를 공부하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당시에 이방인은 토라와 탈무드를 공부할 자격이 없다고 간주했던 유대인들의 선입견을 완전히 뒤집는 말을 힐렐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즉, 이제 이방인인 너 스스로 토라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미쉬나를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의미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각자가 만든 스스로의 미쉬나는 토론과 논쟁을 통해 바르게 교정되고, 진리의 말씀을 탐구함으로써 참된 토라의 바른 진리의 길을 찾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쉬나든, 게마라든 모든 것은 토라의 권위에 의해 제어되고, 무엇보다 토라를 위한 토라와 탈무드 공부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허정문 목사(고신신대원 졸업, 히브리대학교 교육학 석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