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성경시대 풍습으로 이해하는 성경

속옷과 채색 옷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창37:3,4)

복잡한 가정사를 가리키는 우리말 표현 가운데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야곱과 그의 4명의 아내,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서로 ‘엄마의 배가 다른’ 12아들의 스토리를 읽으면서 ‘콩가루 집안’이라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야곱의 12아들의 스토리는 ‘12지파의 탄생’이라는 주일 설교의 제목으로 미화되어서 그렇지, 사실은 그다지 본받을 만한 훈훈한 가정 스토리는 전혀 아니다.

영적인 깊은 해석을 하지 않고 요셉의 이야기를 가볍게 읽는다면 우리는 야곱의 집안에서 몇 가지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첫째, 요셉에 대한 야곱의 지나친 편애다. 야곱의 첫 사랑은 잘 알려진 대로 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이다. 라반은 조카인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점을 이용해, 결혼식 날 첫째 딸인 레아를 들여보내 첫날 밤을 치르게 했다. 그리고 라헬을 얻기 위해 다시 7년을 무료로 봉사하도록 요구했다.

라반은 히브리어로 ‘흰색’이라는 뜻이지만, 그의 속마음은 ‘검은색’으로 한없이 엉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 에서에게로 가야 할 장자의 축복을 빼앗은 야곱을 훈련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권모술수’에 있어서 야곱보다 몇 단계 고수인 라반을 붙여 훈련하신 것이다. 하지만 라헬에게 눈이 먼 야곱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7년의 세월을 수일 같이 여기며 라반을 위해 죽도록 봉사했다.

야곱의 사랑은 받았지만 오랫동안 잉태하지 못하던 라헬은 결국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어 요셉을 출산하게 되었다.야곱은 첫사랑인 라헬로부터 노년에 얻은 요셉을 다른 아들보다 각별하게 사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야곱의 편애가 또 다른 가정의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다.

둘째, 아버지 야곱의 편애에 대한 형들의 지나친 시기심과 미움이다.형들은 매사에 요셉을 편애하는 아버지 야곱으로 인해 불평이 가득했다. 이런 불평은 급기야 요셉을 죽이려는 시도로까지 발전했다. 헤브론에 거하던 야곱 일행은 우기(雨期)가 되어 풀이 나자 멀리 북쪽에 있는 세겜으로 올라가 양들에게 풀을 뜯겼다. 야곱은 요셉을 보내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도록 했고, 결국 형들은 세겜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간 한적한 마을인 도단에서 요셉에 대한 시기심과 미움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셋째, 요셉의 참을 수 없는(?)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이다. 흔히 형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야곱의 편애에 가려져서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지만, 요셉 역시 가정의 불화에 있어서 단단히 한몫을 조장한 면이 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야곱에게 그대로 전했는데, 성경 기자는 그 때 요셉의 나이가 17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0세 미만의 철부지도 아니고 17세 정도 되었으면 충분히 분위기를 파악하고 자신에 대한 형들의 질투와 아버지의 편애를 느끼며 보다 지혜롭게 행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불의를 미워하는 정의로움으로 볼 수도 있지만 ‘고자질’ 당하는 형들 입장에서는 동생 요셉이 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특히 두 번에 이은 꿈 이야기는 그를 총애하던 아버지 야곱까지도 언짢게 하는 것이었다.

야곱 가정의 문제를 훑어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들이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을 합리화하기에는 형들의 시기심과 미움이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다. 야곱 가정의 문제는 많은 가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동생을 죽이려 한다면 가정은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형들은 왜 요셉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그토록 시기한 것일까? 단지 자신들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아버지가 요셉만 편애했기 때문일까? 형들의 미움과 야곱의 편애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창세기 37장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창37:3,4)야곱의 편애는 요셉에게 ‘채색 옷’을 지어주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런 야곱의 행동이 형들의 미움과 불평을 촉발한 직접적인 이유가 된 것 같다. 요즘 말로 한다면 ‘뚜껑이 열리게’ 만든 주된 요인은 ‘채색옷’에 있었다. 그렇다면 채색 옷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여러가지 색깔의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색동저고리’를 요셉에게만 입혀주었다는 뜻일까?‘채색 옷’과 관련해서 KJV 영어성경은 ‘a coat of many color’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Septuagint)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채색 옷’에 대한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원어는 ‘쿠토네트 파씸’인데, 이는 아쉽게도 여러 색깔을 가진 알록달록한 ‘채색 옷’과는 별 관련이 없다.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이것이 다시 영어와 한국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류가 아닌가 싶다.

채색 옷과 속옷

성서시대에 유대인들이 몸에 걸치는 옷은 크게 5가지 종류로 나뉘었다. 속옷, 겉옷, 허리띠, 터번(모자), 샌달(신발)이 그것이다. 옷은 남녀가 모두 비슷했는데, 이로 인해 모세의 율법은 남녀의 옷을 서로 바꿔 입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다.“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신22:5)

5개의 옷 중에서 속살에 가장 가까운 곳에 닿는 옷을 ‘속옷’이라고 하는데, 이를 히브리어로 ‘쿠토네트’라고 한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5:40)

‘쿠토네트’에 대한 합당한 단어가 없어서 ‘속옷’으로 번역되기는 했지만, 쿠토네트는 오늘날 우리들이 입고 다니는 속옷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은 속옷을 입고 밖에 돌아다니면 정신이 약간 나간 사람일테지만, 성서시대에는 ‘쿠토네트’로 불리는 속옷을 입고 밖에서 밭일을 했다. 속옷이 완벽한 외출복은 아닐지라도, 밖에서 일할 때 편하게 입는 옷이었으니,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잠자리에서 입는 잠옷과 비슷한 개념의 속옷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마24:18)속옷은 주로 흰색의 세마포로 만들었는데, 두 개의 커다란 천을 얼굴과 양팔의 구멍만 남기고 꿰맨 무척 단순한 옷이었다. 제사장들은 허리띠에서 모자에 이르기까지 흰색의 세마포로 만든 특별한 옷을 입었다.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레16:4)욥바에 있던 도르가라는 과부는 속옷과 겉옷을 만드는 일이 직업이었는데, 죽은 그녀를 베드로가 기도로써 살려내자 욥바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행9:39)

속옷은 발목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지만 소매가 짧은 것이 특징이었다. 이런 일반적인 속옷에 비해 소매가 팔꿈치를 덮을 만큼 ‘긴 소매의 속옷’을 가리켜 ‘쿠토네트 파씸’이라고 한다. ‘파씸’은 손바닥과 발바닥을 가리키는데, 이는 아마도 소매의 길이가 손바닥까지 덮을 정도로 길었던 데서 나온 단어로 보인다. 그러므로 ‘채색 옷’으로 번역된 ‘쿠토네트 파씸’은 알록달록 여러 색깔이 들어간 ‘색동저고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이 판명되었다.

긴 소매의 속옷, 왕족이 입는 옷

보통 사람들이 짧은 소매의 속옷을 입은 것과 달리 손바닥까지 덮는 긴 소매의 속옷을 입는 사람들은 특별한 계층에 속한 자들이었다. 당시로서는 최상류층인 왕족(royal family)이 입는 독특한 의상이었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유명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기억하는가?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쓴 뿌리를 품고 급기야 서슬 퍼런 반역의 칼날을 갈게 된 계기는 자신의 누이인 다말을 이복 형인 암논이 겁탈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실망에서였다.

다말과 관련된 이야기에도 ‘채색 옷’의 이야기가 나온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인 다말을 연모해서 자신의 방으로 끌어들인 후 강제로 겁탈하고, 다말을 향한 연모의 감정이 순식간에 미움으로 변했다. 결국 암논은 다말을 내쫓고 문을 걸어 잠그었다. 다윗 왕의 딸, 즉 ‘공주’인 다말은 채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것 역시 알록달록 색동저고리가 아니라 ‘소매가 긴 속옷’을 가리킨다.“암논의 하인이 저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 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삼하13:18)

야곱이 요셉에게 입혀준 옷이 이 정도로 특별한 옷이라고 한다면 야곱의 편애에 대한 형들의 지나친 미움과 시기심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야곱이 요셉에게 ‘나이키(NIKE)’와 ‘아디다스(adidas)’와 같은 좋은 메이커의 명품 옷을 사주어서 시기한 것이 아니었다. 설날에 선물로 받는 색동저고리 설빔을 요셉에게만 사주어서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요셉에게 다른 아들과는 다른 특별한 위치, 즉 왕족을 나타내는 심상치 않은 옷을 입혀준 것에 대한 분개였던 것이다. 야곱이 후에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까지 올라갈 것이라는 환상을 미리 보고 이런 옷을 입혀주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향한 야곱의 편애를 통해서도 요셉을 향해 이루실 미래의 비전들을 간접적으로 계시하신 듯싶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비전들이 그저 형들에게는 단순한 비교의식과 시기, 더 나아가 죽이고 싶을 정도의 미움을 낳았던 것이다. 시기심으로 눈이 멀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보지 못한 형들에게는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지어 입힌 야곱의 행위가 충분히 ‘뚜껑이 열리게’ 할 정도로 도발적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류모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