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이슬람 1500년 역사를 따라서 ...에필로그(2)

Q: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유럽에서 이주한 유대인들이 1800여 년간 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의 땅을 강탈해서 이루어진 것인가?

A: 1890년대 시온주의 열풍이 불면서 유럽의 유대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해 오기 전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1860년대에 팔레스타인을 여행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목자들이 밤에 양떼를 지키고 천사들이 노래하던 거룩한 땅에는 더 이상 살아있는 생명체가 없다. 황폐한 팔레스타인 땅에는 맹수와 살그머니 숨어있는 여우만이 고독의 침묵 속에서 잠을 잔다.”

유대인들의 이주가 있기 전 팔레스타인 땅은 한마디로 메마른 사막과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늪지로 덮인 황무지였다. 이것은 인구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1882년에 28만 명이 살던 팔레스타인 땅은 1995년 756만 명으로 증가했다. 28만 명 가운데 유대인이 34000명을 차지한 것을 볼 때 유대인들은 성지 이스라엘과의 연관성을 꾸준히 지속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늪지와 사막으로 버려진 팔레스타인 땅이 개발되고 지금과 같은 농업 천국으로 바뀐 것은 1890년대 유럽의 유대인들이 본격적인 이주를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유대인들은 유럽 유대인 가운데 최대 부호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을 통해 땅을 구입해서 농업 정착촌을 만들었다.

아랍의 대지주들은 낙후된 팔레스타인 땅을 벗어나 주로 카이로, 다메섹, 베이루트와 같은 대도시에 살았는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사막과 늪지로 버려진 자신들의 땅을 매입하자 경쟁적으로 가격을 올렸다.

1944년 기준으로 중동의 비옥한 토양이 에이커 당 110불에 거래될 때 팔레스타인의 불모지가 1000불에 거래된 것을 볼 때, 당시의 개발 열풍과 함께 팔레스타인에 땅을 소유한 아랍 지주들이 엄청난 폭리를 취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들은 왜 사우디 메카의 태수인 후세인과 그의 아들 파이잘을 비롯한 아랍 지도자들이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환영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짐작하게 해 준다. 이들은 선진 기술을 갖춘 유럽의 유대인들이 이주해 옴으로써 팔레스타인의 지역 경제가 소생을 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아랍 지도자들의 기대는 현실로 나타났는데 고용의 기회가 생기고 봉급 인상과 함께 삶의 수준이 올라가자 많은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왔기 때문이다. 1차 대전 당시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인들의 80%는 소작농으로서 당시 ‘기회의 땅’으로 부각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온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첫째, 유대인들은 1890년대 시오니즘 열풍이 불면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오기 전부터 수천 년 동안 성지 이스라엘에서 살아왔다. 흔히 주후 70년 성전이 무너진 후 모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것으로 알지만 유대인들은 성지에서 계속 살아왔다.

9세기, 11세기에는 상당한 번영을 누렸고, 12세기에 유럽의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침공해 올 때도 유대인들은 아랍인과 함께 싸웠다. 1864년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 총 인구 18000명 가운데 아랍인은 5천명, 유대인은 9천명, 나머지는 다양한 종파의 기독교인으로서 유대인이 가장 다수의 주민이었다.

둘째, 1948년 건국 이전에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아랍인의 상당수는 그곳에서 수천 년 동안 살고 있던 정착민이 아니라 1890년대 유럽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과 함께 ‘고용과 기회의 땅’으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해 온 아랍인들이다.

셋째, 유대인들은 아랍인의 땅을 강탈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절차를 따라 매입했으며 매입가는 당시의 이주와 개발 열기로 인해 10배 가까운 비싼 값이 지불되었다. 마이클 코메이(Michael Comay)는 1948년 영국이 물러날 당시 팔레스타인 땅의 9%가 유대인 소유, 3%가 아랍인 소유, 17%는 버려진 땅, 71%는 영국의 위임통치령에 속하다가 이후 이스라엘에 양도된 땅으로 밝히고 있다.

Q: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발생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권은 보장되어야 하는가?

A: 팔레스타인 난민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과 이후 발발한 중동전쟁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떠나 인근 아랍 지역으로 피신해야 했던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가리킨다.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는 유엔 결의안이 통과될 당시 81만 명의 아랍인이 팔레스타인 땅에 거주했다. 이듬해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언하고 5월 15일에 아랍 연합국이 이스라엘을 침공해 오면서 1차 중동전쟁이 일어난다.

전쟁 발발로 65만 명(유엔은 47만 명으로 봄)의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인들이 인근 아랍국으로 피신하고 16만 명은 피신하지 않고 남는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에서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로 난민들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귀환권의 문제가 있다. 제 3자 입장에서 난민의 귀환권은 당연한 권리로 들릴 수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것 역시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첫째, 1차 중동전쟁 발발로 인해 팔레스타인 난민뿐 아니라 유대인 난민도 발생했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에 비해 유대인 난민 문제는 일반인들에게 거의 부각되지 않았지만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유대인 난민 문제를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건국으로 촉발된 아랍 연합국의 공격은 이미 수세기 동안 아랍국에서 살아왔던 유대인들의 강제 추방으로 이어졌다. 아랍국의 유대인들은 ‘잠재적인 배신자’로 여겨져 추방되었는데 그 숫자는 65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능가하는 81만 명이나 된다.

둘째, 팔레스타인 난민과 유대인 난민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상당수는 강제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근 아랍국으로 피신한 것이다. 전쟁이 임박하자 아랍국은 라디오 방송과 전단지를 통해 이렇게 알렸다.“폭탄은 아랍인과 유대인을 구분하지 못한다. 안전을 위해 2주간 동안만 집을 떠나 있을 것을 부탁한다. 당신들은 승리자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흔히 이스라엘이 건국과 함께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인들을 강제로 추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간신히 방어적인 전쟁만 가능했고 이들을 추방할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 반면, 주변 아랍국 내에서 쫓겨난 유대인 난민들은 대부분의 재산을 강탈당하고 강제 추방된 것이다. 이들은 아랍국 내에서 점증하는 반유대주의로 인한 폭동과 생존의 위협에 직면했고 결국 강제 추방의 운명을 맞은 것이다.

셋째, 이스라엘과 아랍국이 이후에 난민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전혀 상반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아랍국에서 쫓겨난 81만의 유대인 난민 가운데 59만 명이 가난한 신생국가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이스라엘은 이들을 흡수했고 유대인 난민은 이스라엘 사회에 완전 동화되었다. 반면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아랍의 형제국에서 배척당했고 80% 이상이 여전히 난민촌에 거주하며 유엔의 난민 기금으로 연명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스라엘은 평화협상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를 협상의 안건으로 올리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이스라엘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건국 당시 작고 가난한 나라였던 신생국 이스라엘이 59만의 유대인 난민을 흡수했다면 640배나 영토가 더 큰 아랍국은 왜 65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흡수하지 못하는가?

2. 유대인 난민이 아랍국에 두고 온 재산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이스라엘에 두고 온 재산의 5배에 달한다. 그 강탈한 재산으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자국민으로 충분히 흡수 동화시킬 수 있지 않은가? 엄청난 오일 달러로 인해 수억 달러를 테러리스트 지원에 사용하면서 팔레스타인 난민 지원에는 왜 고작 수천만 달러밖에 쓰지 않는가?

3. 유대인 난민은 수천 마일을 피해서 이스라엘로 왔고 언어도 새롭게 배워야 했다. 팔레스타인 난민은 바로 인접한 아랍국으로 갔고 언어도 같아 흡수 동화가 훨씬 쉽지 않은가?

류모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