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오슬로 협정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2)

선행적인 자치의 개시

오슬로 협정의 골자는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가자(Gaza)와 여리고(Jericho)를 중심으로 선행적인 자치를 시작하는데 동의한 것이다. 오슬로 협정은 ‘합의할 수 있는 분야부터 합의한다’는 접근방식으로 타결된 것인데, 이런 식의 협상은 분명 장단점이 있다. 장점이라면 교섭을 성공적으로 타결 지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단점은 어차피 부딪칠 민감한 문제들을 계속적으로 회피해 최종 단계를 밀어 넣은 결과 새로운 상호 불신을 낳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위해 가장 민감한 이슈였던 예루살렘 문제, 정착촌 문제, 상호간의 안전보장 문제, 국경의 확정 문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등 5개의 사항이 모두 3단계로 미루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겉으로는 협상이 타결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루어진 것이고 언제 깨질 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인 것이다.아무튼 양측은 오슬로 협정의 1단계 과정으로 1994년 5월 13일 여리고 시에서, 그리고 5월 18일 가자 시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선행적인 자치를 실시하게 된다. 선행자치의 면적은 이들이 최종적인 영토로 삼고자 하는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 전체 면적의 1/20에 불과한 초미니 자치였지만, 그야말로 일단 시작하는데 최고의 의미를 둔 것이다.

선행 자치가 시작되기 전에 쌍방의 과격파에 의한 테러공격이 발생했다. 1994년 2월에는 헤브론의 한 모스크에서 유대인 정착민이 자동소총을 난사해 다수의 아랍인이 살해되었다. 4월에는 아풀라와 텔아비브에서 버스 폭발로 100명의 유대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런 상황은 양측의 평화정착과 공존이 생각처럼 쉽지 않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하지만 이것은 더 큰 비극을 잉태하기 위한 작은 서막에 불과했다..

라빈 수상의 암살과 인티파타 발생

중동 평화 과정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집회 참가자 전원이 ‘평화의 노래’를 드높이 부른 직후에 발생했다. 1995년 1월 4일, 오슬로 협정을 타결시킨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수상이 흉탄에 맞아 사망했다. 20세의 청년인 이갈 아미르가 범인인데, 그는 재판에서 ‘나에게 총의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2000년 이상 된 유대민족의 이 땅에 대한 사랑이다.’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결국 라빈 수상은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을 타결 짓고 암살당한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에 뒤를 이은 것이다.

총 3단계로 이루어진 오슬로 협정은 1단계의 ‘선행자치’를 시작으로 자치가 시작된 지 5년 후에는 3단계인 ‘최종적인 지위 교섭’을 위한 협상이 예정되어 있었다. 즉 1999년 5월이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 문제, 팔레스타인 영토가 될 가자와 서안지구에 들어와 있는 유대인 정착촌 문제, 1948년 이후 발생한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문제 등 가장 민감한 문제들을 위한 협상이 이루어져야 했다. 물론 이 협상이 순조롭게 타결되면 팔레스타인 국가의 선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1999년 5월 이스라엘 수상 선거에서 강경파인 벤야민 네탄야후를 밀어내고 평화파인 에후드 바락이 당선되면서 최종 협상의 타결을 위한 서광이 비치는 듯싶었다. 2000년 뉴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3단계의 ‘최종적인 지위 교섭’에 대한 협상이 본격화되었지만 진전이 없었다. 답답함을 느낀 것은 이스라엘 수상 바락과 중재자인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었다.

바락은 국내 지지율 하락과 연립정권 균열로 반드시 협상을 타결 지어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클린턴은 자신의 임기가 마무리되는 2001년 1월까지 어떻게든 교섭을 마무리짓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8년의 임기 내내 경제 호황으로 인기를 누린 클린턴은 임기 막바지에 터진 폴라 존슨, 모니카 르윈스키를 비롯한 섹스 스캔들이 터지며 인기가 바닥을 쳤다. 클린턴은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을 중재한 카터 대통령의 흉내를 냈고, 중동 갈등의 핵심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멋지게 해결하고 불미스런 섹스 스캔들을 만회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울러 중동 평화의 진전을 이룬 사람에게 따라오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미국 대통령 임기 마지막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1979년 평화조약의 당사자들인 미국 카터 대통령,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이스라엘 베긴 수상이 모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바락과 클린턴의 요청대로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2주일간 합숙을 하며 오슬로 협정의 3단계 협상이 진행되었다. 클린턴의 행동은 카터와 모든 것이 비슷했지만 알맹이인 결과만큼은 달랐다. 카터 대통령과는 달리 사심이 많았던 때문일까? 조급했던 바락과 클린턴은 아라파트의 요구를 놀랄 만큼 수용했지만 아라파트는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바락과 클린턴은 ‘이스라엘 측이 역사적인 양보를 했지만 아랍 측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교섭 실패의 책임을 아라파트에게 돌렸다.

아랍 측 역시 교섭 실패에 반발하며 상호불신감만 깊어졌다. 1994년 시작된 미니 자치로 2000년에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세워질 것이란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절망했고, 이 절망감은 언제 다시 ‘인티파다’(민중봉기)로 점화될 지 모르는 폭풍전야의 상황이 날마다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모든 것을 양보하고도 협상을 타결 짓지 못한 평화파의 바락 수상을 조롱이라도 하려는 듯 강경파인 리쿠드당 당수 아리엘 샤론이 예루살렘 성전산에 있는 알-악사 사원을 자신의 호위부대를 이끌고 방문했다. 협상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산의 주권 문제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곳에 들어가 그 땅이 자신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듯 ‘시찰’한 샤론의 행동은 가뜩이나 성나있던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눈에 명백한 도발 행위로 비쳐졌을 것이다.

결국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이것은 1987년 가자(Gaza)에서 일어난 인티파다에 이은 2차 인티파다를 점화한 불씨가 되었다. 이후 시내 버스와 유명 카페, 피자 집, 대학 도서관 등에서의 연이은 폭탄 테러, 자살 테러 등으로 상징되는 인티파다가 본격화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인티파다는 지금도 ‘진행형’에 있다.

류모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