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탈무드의 요람,예쉬바의 자취를 따라서

랍비 하임(1749-1821)에 이어 볼로진 예쉬바에서는 랍비 네찌브(1816-1893)가 역대 가장 영향력 있는 예쉬바 학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네찌브 시대 때 리투아니안 예쉬바가 가장 융성했으며 또한, 탈무드 교육방법론과 랍비 문학의 발달에 큰 공헌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816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당시 유력한 유대 학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았기에, 기본적으로 탈무드와 관련된 지식에 있어서 숙달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네찌브는 유대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토라에 대해 특별한 교육적인 방법론으로써 법률적인 주제들에 관한 분석적인 연구를 강조했다.

특히, 그는 리쇼님 및 게오님 문학들의 초기 자료들을 검증하면서, 전체적인 타나임 문학에 관련된 모든 구절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일에 집중했다. 나아가 그는 법률학자들의 성문 법전인 레스폰사의 전집과 아가서의 주석에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이러한 학문적 연구로 인해 현대 유대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대교 철학 및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이삭 쿡(1865-1935)과 같은 인물들을 양성할 수 있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리투아니안 예쉬바에서 네찌브의 학문적, 교육적인 헌신과 공헌에 대한 재고찰은 오늘날 현대 예쉬바와 유대인 교육의 방향성을 교정하는 일에 큰 유익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사실, 네찌브는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볼로진의 리투아니안 예시바을 이끌었다. 당시, 예쉬바 학장이었던 네찌브의 처지는 자신들의 교육철학과 커리큘럼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던 하스칼라(유대 계몽주의)의 강력한 성장과 확산에 직면하고 있었다. 랍비 하임이 공들여 지켜왔던 그 리투아니안 예쉬바의 교육철학과 전통을 지키기 위해 네찌브는 여러 위협과 갈등의 요소들을 극복해 나갔다. 이러한 차원에서, 리투아니안 예쉬바와 하스칼라와의 갈등의 역사를 살펴보기 전에 그 갈등의 근원이 되는 하스칼라 운동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 세기 후반 하스칼라 운동의 선봉이 되었던 모세 멘델스존(1729-1786)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프러시아의 유대인 역사와 예쉬바와의 갈등을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유대인의 전체적인 역사를 살펴볼 때, 멘델스존은 사실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차원에서는 매우 높은 평가 받아야 할 인물이다. 그는 유대인이 비유대인들의 나라와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잘 동화되고 융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특히 그는 유대인들이 세속적인 지식을 알고 이해하여, 자신들의 토라와 탈무드의 가치를 이방인 사회에서 승화시키기 위한 문학적인 관심과 노력에 집중했다. 그는 특히 야심 찬 젊은 유대인들에게 독일어의 좋은 지식을 제공함과 동시에 토라와 탈무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과 기존의 랍비적 주해 방법과는 다른 문학적, 문법적인 주해방법을 제시했다.


모세 멘델스존

한편, 멘델스존은 히브리 언어의 사회적, 문학적인 부흥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연구와 세속적인 유대인 문학의 부흥을 강조했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결코 유대교의 종교적 권위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지지하는 반면, 전통적인 가치와 기준에 지나치게 매여 유대인들이 현실적인 감각을 잃은 채 시민사회에 동화되는 삶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당시 신학적, 철학적 차원의 관점에서 주류 종교였던 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그는 칸트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유대교의 대철학자이자 랍비였던 람밤(Maimonides)에 대해 깊이 연구하면서, 이성주의자들과 함께 철학적인 차원에서 종교적인 조화를 이루어 나가기를 원했다. 그는 유대교의 일신교 개념이 자연적 또는 합리적인 종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철학적인 차원에서 모색했으며, 이런 점에서 그는 종교적인 사상의 자유를 주창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멘델스존이 어떻게든 자연 종교와 이신론적인 영향을 깊이 받았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사실상 유대인의 전통적인 의식의 준수는 거부했으며, 적극적으로 하스칼라 운동을 펼치면서 주변 이방인 국가들의 문화적 관행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적응하는 입장을 취했다.하스칼라는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들의 통합과 융화를 위해 당시의 계몽적인 가치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창한다. 특별히 18, 19 세기의 유럽 유대인들 사이에 유대인 역사와 히브리 언어, 세속학문의 연구를 위해 새로운 교육적인 시스템을 강조했다. 반면, 리투아니안 예쉬바는 유럽의 다른 이방 이웃들과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인 관계를 단절한 채 분리된 사회를 형성하며 살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반면, 예쉬바의 랍비들은 토라와 탈무드의 연구에 집중하면서 그들의 공동체를 대표하고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 유럽 사회에 있어서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이런 차원에서, 하스칼라는 게토화된 정통 유대인들의 한계를 극복하고 유럽 기독교 사회로의 동화(assimilation)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하스칼라는 세속적인 차원에서 유대인들의 새로운 문학과 문화적 창조를 강조했고, 나아가 거대한 이방 문화와 종교들 사이에서 자신들만의 건전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미카 요셉 베르디지스키(1865-1921)는 유대인 교육은 반드시 현대화되어야 하며, 이런 차원에서 유대인 학교의 교과 과정은 모두 세속적 학문연구를 개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예쉬바가 추구하는 교육과정과 교육철학 자체에 대해 비난하고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아하드 하암(1856- 1927)은 이런 급진적인 변화보다 예쉬바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극히 일부분의 세속적인 연구들과 러시아어 교사들이 예쉬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제시하는 등 유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하스칼라는 유대인 공동체 사이에서 여러 가지 세속적인 학문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 외부적으로 독일과 러시아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러한 하스칼라 운동을 통해 19세기 후반의 유럽 지역에 팽배했던 유대인 박해에 대응한 유대 민족주의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리투아니안 예쉬바를 중심으로 한 정통 유대인 사회에서는 이러한 하스칼라의 영향을 자신들에게 중요한 전통적인 가치, 토라와 탈무드 연구에 있어서의 교육철학에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했다. 이런 점에서, 리투아니안 예쉬바가 엄격하고 정통적인 토라와 탈무드 연구에 대한 강조가 그 교육학적인 방법론에 융통성이 부족한 외골수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들은 단지 교육과정을 약간 바꾸는 일에 격분하고 거부했던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유대교의 핵심적인 신학과 교육철학과 특별한 교육방법론을 고수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 정부의 압력의 내용은 교과 과정에 기본적으로 러시아어와 세속 과목을 포함시킬 것과, 또한 오후 3시 이후 수업 자체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네찌브는 마침내 이러한 정부와 하스칼라의 요청을 철저하게 거절함으로써 강제적으로 리투아니안 예쉬바의 문은 닫히게 되었다.

다음 호에서 그 러시아 정부와 하스칼라, 그리고 네찌브와의 구체적인 갈등의 요소들을 살펴보면서 교육철학이 반영된 교육과정의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허정문 (고신신대원 졸업, 히브리대학교 교육학 석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