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레바논 전쟁 & 걸프 전쟁

레바논 전쟁: PLO 본부 소탕 작전

1970년 발생한 ‘검은 9월단 사건’ 이후 요르단에서 완전 소탕된 PLO는 남부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겼다. 1971년 자신들을 추방한 요르단과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의 평화협정 조인으로 더 이상 주변 아랍국만 의지할 수 없음을 절감한 PLO는 본격적으로 독자노선에 나섰다.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한 레바논의 남부를 거점으로 게릴라 공격과 로켓포 공격을 반복한 것이다.

1982년 6월 6일 발발한 레바논 전쟁은 로켓포 공격에 방치된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갈릴리를 위한 평화작전’이란 작전명으로 PLO 게릴라의 남부 레바논 거점을 궤멸시킴과 동시에 국경에서 40km 이북인 로켓포 사정거리 바깥까지 게릴라들을 밀어 올리는 것이 작전의 목표였다. 그러나 작전을 수행한 당시 국방부 장관인 아리엘 샤론은 그 이상 북진을 계속했다.

1979년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한 이스라엘은 남쪽의 군사적 위협에서 해방되고 대국(大國) 이집트가 빠진 상태에서 아랍 연합이 무력함을 알고 이번 기회에 보다 큰 그림의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베긴 수상과 샤론 국방부 장관의 진짜 구상은 ‘레바논의 PLO 거점 완전 궤멸, 레바논에 대한 시리아의 영향력 약화, 레바논에 친 이스라엘 정권 수립’에 있었다. 이스라엘 군은 동베이루트에 거점을 둔 마론파 기독교 세력과 합동으로 서베이루트의 PLO 본부를 궤멸시켰다. 서베이루트 포위 2개월 후 7000명의 PLO 게릴라가 시리아, 튀니지, 이라크, 요르단, 남예멘 등으로 추방되었다. 아라파트 의장과 PLO 간부들은 튀니지로 철수하게 된다.

서베이루트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 철수가 완료된 직후인 1982년 9월 1일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새로운 출발’이라는 이름의 신 중동평화안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아랍측은 모로코의 페스에서 열린 아랍 정상회담에서 레이건의 제안에 화답한다. ‘페즈 제안’으로 불리는 이 선언에서 아랍 정상들은 ‘중동 역내 모든 국가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표현으로 간접적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정하게 된다. 이것은 레바논 전쟁 이후 아랍 세계의 분위기가 급격히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냉전의 종언: 얄타에서 몰타로

2차 대전 말인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시작된 ‘냉전’ 체제는 1989년 12월 몰타 회담에서 완전한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미 11월 초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2월 22일 루마니아 차우체스쿠 정권이 몰락하면서 냉전 시대의 종언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1987년 봄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을 초청한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이제는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무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함으로 아사드를 충격에 빠뜨렸다. 70년대부터 시리아는 ‘전략적 균형’ 정책, 즉 시리아의 군사력을 이스라엘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후 평화교섭을 추진한다는 정책을 추진해 왔고 이를 위해서는 소련의 지속적인 원조가 필요했는데 자기 발등의 불을 끄는 게 급한 소련이 중동문제에서 발을 빼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1980-1988년까지 일어난 이란-이라크 전쟁은 아랍 대(對) 이란의 대립구도로 중동의 정치지도를 일순간에 바꾸었다. 1979년에 성공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주변의 세속적인 아랍국 정상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주었고,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대다수 아랍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랍국가는 이란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단독 평화협상으로 인해 소외시켰던 이집트와의 관계도 회복했다. 이런 가운데 시리아는 이란을 계속 지지하고 이집트를 배신자로 비난하며 아랍국 주류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배후에 있는 소련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와의 만남과 몰타 회담 이후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은 즉시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관계 회복에 나섰다. 몇 년 전 이집트가 그랬던 것처럼 자칫 시리아가 아랍세계의 ‘왕따’가 될 수 있는 상황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시리아는 91년 걸프 전쟁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에 가담함으로써 빠르고 민첩한 외교 적응력을 보여주었다.

걸프 전쟁을 향하여

1990년 3월 22일 캐나다 과학자 불 박사가 브뤼셀의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그는 탄도물리학의 전문가로 이라크가 추진 중인 ‘슈퍼건’의 설계를 맡은 자였다. 이것은 포신 길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대포로서 사정거리가 길고 저비용으로 인공위성까지 쏠 수 있는 첨단 무기였다. 이어 3월 28일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 이라크로 밀수입되려던 콘덴서가 압수되었다. 이것은 핵무기 기폭장치로 사용 가능한 것으로 드라마 ‘아이리스’와 같은 허구가 아니라 1990년 발생한 실제 사건이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핵무기를 포함한 이라크의 대량 살상무기 개발 의혹이 급속히 제기되었다. 1981년에 이라크의 원자로를 이스라엘이 폭격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실력 대응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5월 28일 바그다드에서 긴급 아랍 정상회담이 열렸다. 시리아가 이집트에 접근한 것처럼 요르단과 PLO는 신속하게 이라크에 접근했다. 회의 첫날 이라크는 갑자기 쿠웨이트가 오펙 생산 할당 이상으로 석유를 생산한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후세인의 분노는 사실 채무 취소요청에 응하지 않는 쿠웨이트를 향해 있었던 것이다. 후세인은 이란과의 전쟁 중 발생한 채무를 탕감해 줄 것을 쿠웨이트에 요청했는데 쿠웨이트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으름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1990년 8월 2일 후세인은 10만의 이라크 군을 이끌고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8일만에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19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1991년 1월 17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이라크로 진격해 2월 27일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군을 완전히 추방시켰다. 이것이 바로 걸프 전쟁이다.후세인이 쿠웨이트를 합병한 이후 걸프 전쟁이 종결되기까지 7개월 동안 각종 외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연계’(linkage)였다. 이것은 후세인이 쿠웨이트 점령 후 8월 12일에 행한 연설에서 쿠웨이트 문제의 해결 조건으로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포함한 모든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이 완전 철수할 것을 ‘연계’시켰기 때문이다.

PLO는 잊혀진 자신들의 문제를 다시 부각시켜 준 후세인이 고마웠고 그를 지지하기 위해 서안 지구에서 거듭된 유혈충돌로 소란을 일으켰다. 그런 의미에서 걸프 위기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확실히 ‘연계’되기 시작했다. 연계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은 뭐니뭐니해도 걸프 전쟁 기간 동안 이라크가 이스라엘을 향해 스커드 미사일로 공격한 것이다.

다국적군 공격 개시 다음 날인 1월 18일부터 2월 25일까지 총 18회, 39발의 미사일이 이스라엘로 발사되었다. 후세인은 이스라엘을 전쟁에 말려들게 함으로써 자신의 탐욕으로 붉어진 전쟁을 ‘이스라엘 대 아랍’이라는 전통적인 대립 구도로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후세인의 계획에 끝내 말려들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자제 배경에는 부시 미국 대통령의 강한 압력이 있었고 아울러 후세인이 끝까지 판단 미스를 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류모세편집장


아리엘 샤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