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이슬람 1500년 역사를 따라서 - 4차 중동전쟁

이스라엘에 당한 3차에 걸친 치욕적인 패배는 주변 아랍국의 정상들에게 아랍 민족으로서 최소한의 긍지라도 찾아주어야 한다는 정치적 의무감을 부여했다. 특히 이집트는 시내 반도를 통째로 빼앗기고 바로 코 앞에서 이스라엘 군대와 대치해야 했다. 이집트 국민들에게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 이스라엘이 구축한 최신 바레브 요새에서 나부끼는 이스라엘 깃발은 한 마디로 ‘치욕’의 상징이었다.

전쟁 패배 두 달 후인 1967년 8월 수단에서 열린 아랍정상회의에서 ‘아랍의 3가지 No’원칙이 발표되었다.

‘이스라엘과는 강화하지도 않고, 교섭하지도 않고, 승인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미국은 1970년 미국 주도의 중동 평화협상을 제기했고 여기에 요르단과 이집트가 화답하면서 평화의 물꼬가 트여지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중동전쟁으로 향하는 서막에 불과했다. 이어진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의혹에 찬 죽음과 ‘검은 9월단’ 사건, 새로 취임한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으로 인해 중동의 판세는 처음부터 새롭게 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번 장에서는 삼세번으로는 미련이 남았는지 마지막 중동전쟁인 4차 중동전쟁으로 향하는 당시의 긴박한 상황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검은 9월단 사건

연거푸 당한 치욕적인 패배와 영토 상실로 깊은 좌절에 빠진 아랍 진영은 1970년 미국이 주도하는 중동 평화협상에 이집트와 요르단이 참여하면서 새로운 물꼬를 트는 듯싶었다. 하지만 요르단에 본거지를 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태클을 걸면서 상황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게 되었다.

PLO 내 조직인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은 이에 항의해 서방 항공기 4대를 유럽 상공에서 납치해 이집트와 요르단 사막에서 폭파하는 강수를 두었다. 이에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도 자국 내에 있던 PLO 조직의 소탕작전을 선포했고, 이후 요르단은 내전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에 대한 반발로 1970년 PLO 산하에 과격 테러단체인 ‘검은 9월단’이 조직된다. 이 조직의 이름은 1970년 11월 이집트를 방문한 요르단 총리를 카이로의 호텔에서 암살하면서 자신들을 ‘검은 9월단’으로 부른 데서 유래했다. 후세인은 1971년 PLO 조직의 완전 소탕에 성공하고 이후 PLO는 레바논으로 본부를 옮기게 된다.

오늘날의 ‘알 카에다’처럼 ‘검은 9월단’이 전 세계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킨 것은 1972년 서독 뮌헨 올림픽에서 있었던 선수촌 습격 사건이다. 이들은 올림픽 선수촌에 침투해 이스라엘 선수 2명을 사살하고 9명을 인질로 잡고 대치하다가 전원 사살되었고 이 광경은 전 세계 TV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 현장은 20세기 최고의 화약고인 중동 문제를 전 세계인들에게 극적으로 각인시키는 장이 된 것이다.

이집트, 새로운 인물 사다트의 등장

1970년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내전에 휩싸인 요르단 문제를 수습하려고 하다가 축적된 과로로 인해 죽는다. 그의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밝혀졌지만 암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나세르의 죽음으로 그와 사관학교 동기이자 부통령인 사다트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사다트가 취임한 초기 3년간은 이집트 현대사에서 최악의 사기 저하와 경제 불황으로 고통 받던 시기였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에 빼앗긴 시내 반도 탈환을 요구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사다트는 나름대로 개혁에 대한 청사진이 있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개혁 드라이브를 밀어부치기에 자신이 그다지 지지기반과 인기가 없는 대통령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이집트 내부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돌파구로 여겨졌다.

이런 가운데 시리아는 6일 전쟁에서 빼앗긴 골란 고원을 수복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군 현대화를 추진했다. 시리아는 이집트로부터 약간의 도움만 받는다면 골란 고원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만큼 충분한 군사력 증강에 성공한다.

대속죄일 전쟁

1973년 10월 6일, 드디어 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이슬람의 한 달 금식기간인 ‘라마단’ 기간에 일어나 ‘라마단 전쟁’이라고도 하고 이스라엘의 금식일인 대속죄일(욤-키푸르)에 일어나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4차례의 중동전쟁에서 6일 전쟁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전쟁이기도 하다.

아랍측은 수 차례에 걸쳐 총공격설을 퍼뜨리고 이스라엘도 이에 전군 소집령으로 대응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한 양치기 소년처럼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이스라엘도 경계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6일 전쟁에서 환상적인 승리에 대한 도취감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실제로 이스라엘은 전쟁이 발발하는 순간까지 긴장이 많이 풀려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6일 전쟁으로 영토가 5배 이상 확장되자 이전처럼 바로 코 앞에서 적들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난 것이 긴장감을 늦추게 만든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군은 중동 최강을 자랑하는 공군력만 믿고 이스라엘 최고의 성일(Holy Day)인 대속죄일 명절에 들어갔다. 이 날은 이스라엘의 성인 모두가 24시간 금식에 들어가며 TV, 라디오 등 모든 방송매체도 방송을 하지 않고 거리에도 모든 차량 통행이 금지되는 날이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4차 중동전쟁의 디-데이(D-day)는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대속죄일’로 정해진 것이다. 전쟁 개시는 극비리에 알려졌고 심지어 병사들도 전쟁 발발 몇 시간 전까지도 이를 모를 정도로 비밀이 유지되었다. 4차 중동전쟁은 개전 후 48시간까지 아랍측의 완벽한 우세로 전개되었다.

이집트 군은 수시간 만에 수에즈 운하를 건넜고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제공권도 지대공 미사일에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수시로 격추되면서 명성을 잃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무패 신화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집트 군은 수에즈 운하를 건너 동쪽으로 10km까지 진격했다. 시리아 군도 골란 고원을 차지했다. 그러나 아랍측의 진격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이스라엘의 결사적인 항전이 시작되었고 미국의 원조도 큰 힘이 되었다. 특히 미국 첩보위성은 이집트 군 중앙부와 취약지구를 구별해 낱낱이 이스라엘 군에 통보해 주었다. 전쟁 2주 후 수에즈에 주둔한 이집트 군 중앙부를 돌파해 수에즈 운하 역도하에 성공한 이스라엘은 운하 건너편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카이로를 향한 진격을 앞두었다.

수에즈 운하 도하를 위해 선두에 배치된 특공대는 거의 전원 사망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북부 전선에서도 골란 고원에서 시리아 군을 완전히 쫓아내는 데 성공했고 시리아의 수도인 다메섹으로의 진격을 앞두었다.

류모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