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탈무드의 요람, 예쉬바의 자취를 따라서

리투아니아 예쉬바의 최초 모델은 현재 벨로루시 지역인 당시 러시아의 도시였던 볼로진의 예쉬바였다. 최초의 리투아니아 예쉬바는 빌라 가온의 제자였던 랍비 하임 이츠코비츠에 의해 1803년에 설립되었다. 빌라 가온의 영향을 받은 랍비 하임은 특히 유대교의 교육 철학적, 신학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는 그 예쉬바의 교육 시스템을 특별한 교육 철학을 중심으로 발전시키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1854년 오늘날 예쉬바 학장을 의미하는 로쉬 예쉬바로 임명된 베를린의 나프탈리 쯔비 예후다, 오늘날 나찌브로 불려지는 그의 지도력 하에서 리투아니아 예쉬바의 교육적인 영향력을 비롯하여 지역사회에 사회적, 정치적인 영향력이 절정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 정부의 탄압이 시작됨과 동시에 당시 유대교 내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끼친 18세기 하스칼라 계몽 운동이 합세하면서 리투아니아 예쉬바의 황금기는 점점 저물어가게 된다. 긍정적인 관점에서의 유대교 계몽 운동이었던 하스칼라는 세속적인 학문들을 최대한 수용하는 입장을 유지하면서, 보다 민족적인 유대문학을 융성하게 발전시키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세속화되고 동화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독일과 러시아를 비롯한 시대적, 문화적인 상황의 변화에 발맞추어 보다 학문과 예술의 영역에서 새로운 유대교의 르네상스를 기대하는 바램이 깊이 뿌리내려져 있었다.

그러나, 예쉬바의 정통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하스칼라가 추구했던 기본적인 정신은 인정할 수 있었으나, 궁극적으로 그 문화적인 융합이라는 이름 하에 세속문화와 가치에 동화되는 것을 반대했으며, 무엇보다 세속적 학문과의 교육과정과 교육철학에 있어서의 타협을 철저히 거부했다.

Yehuda Berlin

볼로진 예쉬바가 진실로 유지하고 지키기를 원했던 것은 다름 아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과정이었으며, 나아가 그 교육과정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운영이었다. 그들은 그 모든 교육과정이 온전히 토라와 탈무드 연구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보았기에 오직 모든 학문연구의 시간을 토라와 탈무드 연구에 투자했다.

그러나, 사실 학생들에게는 세속 학문들을 연구할 수 있는 길들은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당시에도 학문적인 차원에서 보다 뛰어난 대학들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만약 예쉬바의 학생들이 세속학문을 공부하고자 할 때, 랍비들은 그들에게 세속학문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세속학문에 대해 개별적으로 공부하는 것까지 금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쉬바에서의 교육과정에 세속학문의 교육과정을 의무적으로 가르치게 하는 것과, 또한 세속학문을 위해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이방인 교사들이 예쉬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러한 리투아니아 예쉬바의 교육형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정부를 대항하는 위협적인 존재로서 예쉬바를 지목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인식은 하스칼라 운동을 지지했던 세속 유대인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러시아 정부와 하스칼라는 예쉬바가 가능한 토라와 탈무드 연구를 비롯한 유대학에 관련된 공부를 줄이고, 러시아어를 비롯한 세속 학문을 교육과정에 주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볼로진 예쉬바는 초창기의 빌라 가온의 가르침에 따라 교과과정을 바꾸기를 거부했고, 오직 토라와 탈무드 연구에 집중하는 형태를 고집했다. 나찌브가 결국 러시아 정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에 불복함으로써 볼로진의 예쉬바는 강제로 러시아 정부에 의해 1892년에 폐쇄되었다.

결국 이러한 교육과정에 대한 집중적인 정부의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그 예쉬바들이 문을 닫게 되었지만, 이후에 다른 지역들에서 예쉬바의 형태는 유지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예쉬바의 교육철학과 핵심정신은 지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돌아가 이 리투아니아 예쉬바에서 교육철학과 교육과정의 발전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세 인물, 빌라 가온, 랍비 하임과 나찌브에 대해 보다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이 어떤 교육철학을 가지고 이 예쉬바를 설립하고 운영했는지, 예쉬바의 당시의 상황과 교육과정을 둘러싼 중요한 이슈들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18세기 후반 이후 예쉬바의 영적인 삶과 본질적인 토라와 탈무드의 학문연구의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앞서 언급했던 빌라의 가온(1720-1797)이었다. 가온은 그 이름의 의미와 같이 학문적 소양과 인격에 있어서 천재적인 ‘탁월함’을 겸비한 학자이자 지도자였다. 가온의 학문적인 업적과 정신적인 영향은 시대를 걸쳐 그 저술들과 학생들의 실제적인 구전에 의해 입증되었다.

당시, 신비주의적인 열렬한 예배를 지향했던 하시딤과 반대로 전통적인 유대교가 지켜야 할 할라카와 토라와 탈무드 연구를 강조했으며, 나아가 이러한 종교적 열정이 토라와 탈무드 연구보다 앞서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가온은 당시 15-16세기에 스페인 중심의 스파라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유럽 지역에 유행했던 필풀의 성경해석학적 방법론을 반대했다. 필풀은 당시 토라와 미쉬나의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다른 초기 권위 있는 본문들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열정적이고 독창적인 방법을 통해 해석학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가온은 이러한 필풀의 방법론을 매우 가혹하게 혹평했다. 그는 오직 명료한 해석과 언어학적인 기초에 입각한 문학 비평을 통해 과학적이고 건전한 방법을 채택하기를 원했다. 그는 특별히 당시의 성경학자들의 다소 신비적이고 알레고리칼한 해석학적인 접근들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Sofer

그는 고대 텍스트들을 세밀히 고찰하면서 특별히 문법적인 필사상의 오류들에 대해 엄격하게 다루었으며, 나아가 그는 유대교에 있어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성경해석적인 규범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수세기에 걸쳐 행해져 온 필사상의 오류들을 교정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철저하고 엄격한 텍스트의 교정을 기록한 그의 메모 하나하나가 오늘날 텍스트의 연구에 중요한 기준과 권위를 가진다. 그는 이러한 언어학적, 문법적인 텍스트 접근을 지향함과 동시에 과학과 수학과 같은 세속적인 지식들까지 고려하면서 토라와 탈무드 연구의 탁월성을 보여주었다.

한편, 가온은 그의 제자들의 구전에 의해 자선과 근면을 통해 당대의 의인으로서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의 가난한 삶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선 단체에 자신의 소득의 20%를 제공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전해지는 예화로 이러한 고아인 소녀가 결혼을 하려고 할 때, 포로들을 구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요구가 있었을 때에 그는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내어 그들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많은 그의 인격적인 탁월함을 전하는 증언들이 있다. 그는 자신의 끊임없는 학문적인 연구에 최선을 다해 매진하는 반면, 항상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향해 열린 귀를 가지고 도우려고 노력했다. 그는 40년 동안 오로지 학문 연구에 매진했으며, 그 후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생애에서 학문적인 영역에서의 가장 큰 수확은 앞서 언급했던 볼로진 예쉬바의 창시자인 랍비 하임이라는 학생을 가르치고 양성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랍비 하임은 거의 가온의 학문적, 정신적인 분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세운 볼로진 예쉬바는 약 100년 동안 토라와 탈무드 연구에서 최고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오늘날 예쉬바의 가장 근원적인 모델이 되었다. 다음 호에서 랍비 하임과 나찌브의 교육 철학을 중심으로 한 예쉬바의 교육과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허정문 목사 (고신신대원 졸업, 히브리대학교 교육학 석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