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이슬람 1500년 역사를 따라서 - 3차 중동전쟁

팔레스타인 아랍인과 PLO의 등장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과 함께 시작된 1948년, 1956년 두 차례의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변 아랍국들이 주도적으로 일으킨 전쟁이었다. 유대인과 함께 팔레스타인 땅에 남게 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스스로를 주변의 아랍 형제들과는 달리 ‘팔레스타인 아랍인’으로 인식하며 고유한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이 중동 지역에 광범위하게 흩어진 아랍인, 개중에서도 시리아의 다메섹을 중심으로 한 대(大) 시리아 아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벗고 ‘팔레스타인 아랍인’으로 불리는 고립된 아랍인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자각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2차례에 걸친 대(對) 이스라엘 전쟁에서의 참담한 패배였다. 무능한 주변 아랍국만 믿고 있다가는 팔레스타인 땅에 자신들만의 아랍국가를 세우는 것이 요원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둘째, 자신들의 이익만 좇는 아랍 형제국들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이스라엘의 독립과 함께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댄 주변 아랍국들은 주도적으로 그리고 경쟁적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겉으로 드러난 이슈는 ‘아랍은 한 형제’라는 아랍 민족주의였지만 그 속내는 참으로 치졸했다. 이집트와 요르단은 스스로를 아랍 세계의 수장으로 여기며 불꽃 튀는 경쟁을 벌였다.

특히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이 전쟁이 끝난 후 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지구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것을 본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주변 아랍국의 리더들의 관심이 팔레스타인 땅에 자신들만의 아랍 신생국을 세워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국 영토를 확장시키는데 있음을 분명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1964년 카이로에서 열린 1회 아랍 정상회담에서 아랍연맹의 지원을 받으며 창설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말 카이로 대학에서 공부하던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해방’을 목표로 하는 조직이 이미 만들어졌다. 이 조직이 바로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끌던 ‘파타’(Fatah)였다. 파타는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팔레스타인 해방인민민주전선과 함께 PLO를 이루는 3대 거대조직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중 가장 큰 조직인 파타의 리더인 아라파트가 1968년 제3대 PLO 의장에 선출되면서 PLO는 국제사회와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공식 기구로서 발돋움하게 된다. 이들의 목표는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아랍인 스스로 해방시킬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강하므로 게릴라 활동을 기폭제로 주변 아랍국들을 끌어들여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전을 시도하는 것’이다.

6일 전쟁 발발 직전에 환하게 웃고 있는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고조되는 전쟁의 기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공식 출범과 ‘파타’의 게릴라 활동으로 중동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고 1967년 5월 이집트가 시내 반도에 주둔하던 유엔 평화유지군을 축출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소련 영향권에 들어간 시리아는 파타의 게릴라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맞닿은 국경에 10만의 군대를 배치했고 다시 한 번 티란 해협에서 이스라엘 선박의 통행을 봉쇄했다. 수에즈 운하의 통행이 허용되지 않던 이스라엘에게 국제 수로인 티란 해협 봉쇄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시리아도 이스라엘과의 국경인 골란 고원에 탱크와 군사를 집중 배치하고 나섰다.

아랍 주변국의 전방위 압박으로 코너에 몰린 이스라엘은 결국 선제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방법을 택했다. 1967년 6월 5일 새벽에 전격적인 공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침 9시에 두 번, 저녁에 한 번 더 공습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이집트 공군은 제대로 떠보지도 못하고 궤멸되었다. 이스라엘 공군의 놀랄만한 성공으로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스라엘은 지상군을 투입해 3일만에 수에즈 운하를 포함한 시내 반도 전체를 점령했다.

동부 전선에서도 요르단이 차지하던 예루살렘과 서안지구를 점령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성지인 예루살렘 ‘통곡의 벽’과 성전산(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곳)의 회복을 위해 최정예 지상군 투입과 낙하산 부대가 성전산 위로 투입되는 육-공군 양육작전이 시행되었다. 1948년 독립 전쟁 이후 예루살렘과 서안 지구(West bank)를 차지한 요르단은 일 년의 하루를 제외하고 유대인들의 통곡의 벽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허락된 날은 주후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성전이 무너진 날, 즉 유대인들이 ‘티샤 베아브’(성전파괴 애도일)로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것도 정치적인 불안으로 허가가 취소되면 내년을 기약해야 했다. 통곡의 벽에 들어온 유대인들은 한 맺힌 통곡의 기도를 드렸고 떠날 때는 자신의 기도제목을 쪽지에 적어 벽 사이의 틈에 구겨 넣었다.

당시 예루살렘 구시가지 안의 비아돌로로사(십자가의 길)를 따라 진격하던 무전병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보고했다.“바로 우리 앞에 ‘코텔’(통곡의 벽)이 보인다.”유대인 최고 성지인 통곡의 벽을 함락하던 순간 군인들은 벽에 손을 대고 하나같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하나 둘씩 입가에서 읊조리기 시작한 노래가 있다. 바로 6일 전쟁 발발 3주 전인 독립기념일 전야에서 발표된 작곡가 나오미 슈머의 노래인 ‘예루샬라임 셸 자하브’(황금의 예루살렘)였다.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들은 국민들도 저마다 이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감격으로 ‘황금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가인 ‘하티크바’(희망)만큼이나 사랑 받는 국민적인 노래가 되었다.

북부 전선인 시리아의 골란 고원 함락도 또 다른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제공한다. 시리아는 2차례 전쟁에서 맥없이 패배하자 작전을 바꾸어 이스라엘의 최대 약점인 물 문제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전략으로 나섰다. 1964년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최대 수원지인 갈릴리 호수로 유입되는 요단강 상부 수원의 흐름을 변경하는 수로 건설공사를 개시했다.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이스라엘의 수자원은 35% 수준까지 감소되어 그야말로 이스라엘 국민을 중동의 뙤약볕 아래 말려 죽이는 ‘고사 작전’이 성공하게 된다.

점증하는 중동 위기를 논하기 위해 모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골란 고원에서 이루어지는 시리아의 수로 건설 현장을 수 차례 공습으로 파괴했고 이것 역시 6일 전쟁을 초래한 대표적인 긴장 요소 중 하나였다. 이 즈음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배출한 최고의 스파이인 엘리 코헨이 시리아에서 활동했다. 시리아에 침투해 국방부 차관까지 올라가 시리아 내 최고급 군사정보를 이스라엘 측에 넘겨준 엘리 코헨은 결국 간첩 행위가 발각되어 1965년 수도인 다메섹 노상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죽은 지 2년 후에 발발한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은 제한된 병력으로 곳곳이 요새화된 골란 고원으로 진격하는 문제로 격렬한 논쟁과 회의를 거친다. 장시간의 회의는 골란 고원의 수로(水路)를 갖고 그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오던 시리아로 인해 ‘무조건 진격’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이스라엘 군은 그나마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2년 전에 죽은 엘리 코헨이 넘겨 준 골란 고원 내 시리아 군의 진지와 벙커, 탱크 은닉처 등에 대한 자료였다. 이 자료는 거의 100% 정확했고 ‘난공불락의 요새’인 골란 고원 전체를 불과 10시간 만에 정복하는 쾌거로 이어졌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애꾸눈’ 모셰 다이얀 장군은 후에 골란 고원 정복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엘리 코헨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골란 고원을 함락시키기 위해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골란 고원의 점령은 영원히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불과 6일만에 끝난 3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 영토는 20700km2에서 102400km2로 무려 5배나 확장되었다. 이전에 요르단이 차지하던 서안 지구, 이집트가 차지하던 가자 지구와 시내 반도, 시리아가 차지하던 골란 고원이 이 때 이스라엘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불과 6일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수상이던 에슈콜은 “주변 아랍국들은 이스라엘이 1주일 전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는 헛된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연설함으로써 점령지에서 철수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 반환을 조건으로 해당 아랍국과 직접 교섭에 나섰고, 이스라엘 국가의 승인, 안정적인 국경의 확립, 수에즈 운하 및 티란 해협과 같은 국제수로에서 이스라엘 선박의 자유로운 통행, 예루살렘의 합병과 같은 문제들을 주도적으로 협상해 나갈 수 있는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류모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