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척 유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내신 마지막 유월절의 쎄데르 식사 중에 하신 이 말씀을 하신 것을 아는 성도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예수님은 왜 최후의 만찬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말씀하셨을까? 왜 감람나무나 무화과나무는 안되는 걸까? 포도나무의 비유는 예수님이 유월절 쎄데르에서 4잔의 포도주를 마시면서 만찬을 마치신 후에 하신 말씀이다. 이것만큼 시의적절한 비유가 또 있겠는가? 아무 뜬금없이 포도나무 비유가 튀어나온게 아니라는 뜻이다.
왜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네 잔의 포도주를 마실까?
4잔의 포도주를 마시며 유월절 예식을 하는 유대인들의 풍습은 출애굽기 6:6-8절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출6:6-8)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꺼내신 하나님의 손길과 역사하심을 4가지의 서로 다른 동사를 사용해 점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인 유월절에 마시는 4잔의 포도주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너희를 빼어내며’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너희를 구속하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기쁨을 기억하는 유월절에 ‘생명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전10:19)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제해 버린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그리고 제자들을 ‘가지’로 비유하셨다. 이는 곧 있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제자들과의 이별을 준비하시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정리하면서 주신 일종의 유언과 같은 말씀이다.
앞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없이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내 안에 거하라’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방향을 주셨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15:2)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에는 두 종류의 서로 다른 가지가 나온다.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와 과실을 맺는 가지가 그것이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를 ‘제해 버리시고’, 과실을 맺는 가지는 ‘깨끗케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 가지에 속할까? 과실을 잘 맺는 가지일까, 아니면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일까? 세미나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면 많은 분들이 주저대면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는 한참 고민을 한 후 “지금은 과실을 잘 맺지 못하지만 잘 맺기 위해 노력하는 가지”라고 새로운 대답을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본문에는 이런 제 3의 가지는 없다. 단지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와 과실을 맺는 가지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질문을 내게 던지실 때, 과연 “나는 과실을 잘 맺는 가지입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몇이나 될까? ‘지금은 과실을 잘 맺지 못하지만 잘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대답이 어찌 보면 가장 솔직한 대답일 듯싶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 기초해서 보면, 이런 가지도 결국은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에 속할 뿐이다. 우리는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이므로 하나님이 싹뚝 ‘제해 버리실’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정말로 농부이신 하나님은 이런 가지들을 가차없이 제해 버리신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제대로 붙어있을, 제대로 남아날 가지가 있을까?
‘제해 버린다’는 ‘들어주신다’(?)
요한복음 15:2절 말씀은 성서시대 이스라엘에서의 포도 농사법에서 나온 독특한 표현이다. 포도나무의 특징은 길게 뻗어나가는 가지에 있다. 오늘날 포도 재배에서는 ‘Y’자 철사를 박아놓기 때문에 포도나무 가지는 철사를 따라서 감아 올라가면서 원없이 자랄 수 있다. 그러나 성서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오늘날의 포도 재배법과 상황이 전혀 달랐다. 철사가 귀했으므로 포도 가지는 뱀처럼 땅을 기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땅에 닿은 포도 가지는 열매를 제대로 맺을 수 없다는데 있다. ‘우기’에는 땅에 닿은 부분이 습기로 인해 썩고, ‘건기’에는 자체적인 뿌리를 내리다 보니 본 뿌리에서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서시대 농부들은 땅바닥에 닿아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를 적절하게 처리해 주어야 했다. 이 때 하는 것이 가지를 ‘들어주어’ 밑에 돌을 괴어 놓는 것이다. 이로써 과실을 잘 맺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과실을 잘 맺는 가지는 잔가지를 쳐주는 전정작업을 통해 잘잘한 포도 열매가 아니라 극상품의 포도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처럼 성서시대 포도 농사에서 농부가 신경 써야 할 두 가지 작업은 땅바닥에 닿아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는 밑에 돌을 괴어 ‘들어주고’, 과실을 맺는 가지는 깨끗하게 ‘잔가지 치기’를 해주어 극상품의 포도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를 ‘제해 버린다’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성서시대 포도 농사법을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잘못된 번역이다. 물론 영어 성경에도 ‘cut off’ 또는 ‘take away’로 되어 있으니 우리말 성경만의 오류는 아닐 것이다. 이 단어는 당연히 ‘들어주신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잔가지를 쳐주며 제해 버리는 가지는 오히려 과실을 잘 맺는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영어 성경과 우리말 성경은 이 부분에서 오역이 발생한 것일까? 이는 ‘제해 버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 속에 그 해답이 있다. ‘제해 버린다’의 헬라어 원어인 ‘아이로’는 ‘제해 버린다’(take away)와 ‘들어준다’(life up)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눈’이라는 우리말 단어도 하늘에서 내리는 ‘눈’(snow)과 사람 얼굴에 있는 ‘눈’(eye)의 두 가지를 모두 의미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에 대한 판단은 문맥을 보고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2절 말씀은 성서시대 포도 농사법에서 나온 것인데, 이를 알지 못한다면 무심코 ‘제해 버린다’로 번역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성서시대 포도 농사법을 알아야만 문맥 안에서의 올바른 판단이 가능하므로, 성경의 번역이 단순히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어휘 실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정반대로 바뀐다는 것이다. 땅바닥에 닿아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를 ‘제해 버린다’고 해석하면 이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두려움을 주지만, ‘들어주신다’고 해석하면 이는 연약한 우리들을 위로해주는 놀라운 권면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다. 때로 과실을 맺지 못할 수도 있고 잘 맺을 수도 있지만 상황과 결과에 따라 그렇게 요동하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않은가? 그것은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는 들어주시고, 잘 맺는 가지는 잔가지치기의 작업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상급의 포도 열매를 맺도록 부지런히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지에 불과한 우리들은 그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가룟 유다처럼 은혜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지만 않으면 된다. 가지가 좋은 과실을 맺는데 있어서 필요한 최상의 작전은 ‘진득하게 버티기’에 있는 것이다.
- 류모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