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이슬람 1500년 역사를 따라서 - 2차 중동전쟁

이스라엘의 기습적인 독립선언과 이를 막기 위한 아랍 연합군의 준비되지 않은 전쟁은 누가 보아도 압도적인 우세를 보일 것 같았던 아랍의 ‘믿어지지 않은’ 패배로 결말이 났다. 이스라엘은 엄청난 ‘피’를 흘리며 신생국가 이스라엘을 지켜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시작될 ‘끝 모를’ 중동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아랍 연합군의 참담한 패배는 연합군의 선두 세력이던 요르단과 이집트에서 전혀 엉뚱한 결과를 초래했다.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52년 암살당했고, 이집트의 파루크 국왕은 같은 해에 일어난 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집트는 새로 등장한 영웅 나세르 대통령을 중심으로 새로운 중동전쟁을 준비했고 그 시발점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식의 상당부분을 소유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겠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나세르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은 왜 2차 중동전쟁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 것일까? 이번 장에서는 1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의 전후 상황과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인 냉전 체제 속으로 빠르게 편입된 중동의 정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왕정 폐지로 이어진 이집트의 쿠데타

이집트는 1차 중동전쟁에 참전했던 장교들을 중심으로 무능하고 부패한 왕정체제를 뒤엎고자 하는 혁명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체제 전복을 위한 수많은 비밀단체들이 만들어지고 그 가운데 대중적인 기반은 없지만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자유장교단’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자유장교단’은 풍족하지 않은 서민 출신의 300명 정도의 소장파 장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은 중동전쟁의 영웅으로서 신망이 높은 나기브 장군의 입각을 요구하고 나섰다. 국왕의 계속된 거절로 이들은 1952년 5월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무런 저항 없이 정권을 장악한다. 강제로 퇴위된 파루크 국왕은 해외로 추방되었고 그의 장남인 6세의 푸아드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나기브 장군을 수상으로 한 내각은 1953년 6월, 내친김에 왕정 자체를 폐지해버리고 나기브가 대통령에 선출된다.

이후 대중적 기반이 높은 무슬림 형제단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혁명 세력 내부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초래된다. 1954년 2월 무슬림 형제단은 자유장교단의 두목인 나세르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지만 실패한다. 결국 무슬림 형제단은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고 무슬림 형제단과 친분이 두터웠던 나기브는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이로써 혁명의 실질적 주체세력이었던 나세르가 수상이 되고 1956년 신헌법을 통해 이루어진 선거에서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된다.

아랍의 영웅으로 등장한 나세르

대통령 취임과 함께 시작한 그의 첫 작품은 수에즈 운하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을 철수시킨 것이다. 아랍 민족주의에 불타는 나세르가 이집트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면서 중동 정세는 다시금 급박하게 돌아갔다. 그는 미국과 소련을 대표로 하는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어느 진영에서 확실하게 발을 담그지 않는 등거리 외교를 추진하며 이집트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으로 높은 인기를 누린다.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아스완 댐 건설을 추진하고 필요한 자금은 미국을 위시한 서유럽에서 차관과 원조로 조달할 계획을 세운다. 아울러 군사력 증강을 위해 미국과 서유럽의 지원을 요청한다. 1950년에 체결된 미국-영국-프랑스간의 무기제한 협정으로 서구 세계가 이를 거부하자 나세르는 소련에 접근한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소련제 무기 도입이 이루어진다. 미국은 이에 반발해 나세르의 대통령 취임 한 달 후인 7월에 지원을 약속했던 IMF의 2억 달러 차관을 전격 취소한다.

야망과 패기의 나세르도 이에 굴하지 않고 소련을 등에 업고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해 버린다. 아울러 미국의 맹방인 이스라엘이 티란 해협을 통과하는 것을 봉쇄하겠다고 발표한다. 티란 해협 봉쇄는 이스라엘이 인도양 진입을 위해 아프리카를 한 바퀴 돌아야 함을 의미했다. 수에즈 운하 주식의 상당수를 보유한 영국과 프랑스도 나세르가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함으로 허를 찔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세르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위험한 줄타기 외교는 결국 중동에 또 다른 전운이 감돌게 했다. 몇 차례의 비밀 접촉과 협상으로도 수에즈 운하 문제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영국과 프랑스는 조심스럽게 군사행동을 계획한다. 이집트와 인접한 이스라엘의 동참을 종용했고 티란 해협 봉쇄와 나세르의 등장과 함께 잦아진 가자(Gaza) 지구의 게릴라 공격에 지친 이스라엘도 이 제안에 선뜻 응한다.

1956년 10월 29일 애꾸눈 명장인 모셰 다이얀의 신속한 작전으로 이스라엘 군은 손쉽게 시내 반도를 장악한다. 때를 맞춰 영국과 프랑스 전투기는 이집트의 전투기를 공습하고 이집트 공군은 대부분 제대로 떠보지도 못하고 궤멸된다. 곧 영-프 연합군의 지상군이 투입되고 손쉽게 수에즈 운하를 장악한다.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전개된 2차 중동전쟁은 전쟁 자체만 놓고 보면 영국-프랑스-이스라엘 3국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이후로 전개되는 상황은 전혀 다르게 돌아갔다. 미국과 소련은 중동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입김과 영향력이 다시금 강해지는 것을 견제하고자 이들의 군사행동을 강하게 비난했다. 소련은 이집트에 대한 3국의 군사행동을 평화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필요하다면 대륙간 탄도미사일 공격도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소련은 이에 대해 미국과의 공동보조를 요청했고 미국은 소련의 입맛대로 응하지는 않았지만 소련의 공격 시 미국은 3국을 돕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전쟁 발발 6일만인 11월 6일 유엔의 중재로 정전이 선포되고 영국-프랑스는 12월, 이스라엘은 이듬해 3월에 완전 철군함으로 전쟁은 마무리된다.

때로는 군사력만으로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것이 ‘수에즈 전쟁’으로도 불리는 2차 중동전쟁이다. 3국의 일방적인 승리는 허물뿐인 승리였고 이들의 무력 도발은 중동지역에 범 아랍 민족주의만 촉발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에 대한 기득권을 완전 포기해야 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미소의 냉전체제를 적절히 이용해 식민지배의 잔재인 수에즈 운하의 완전 국유화에 성공한 나세르는 일순간에 아랍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아랍 민족주의가 확산되고 통일된 아랍제국을 향한 꿈이 조금씩 실천에 옮겨졌다. 결국 나세르는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정치와 외교에서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가 퇴장해 힘의 공백상태가 나타난 중동의 외교 무대에서는 그 틈을 타 미국과 소련이 확실히 안착하게 된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왕정체제의 보수적인 아랍국(요르단, 사우디)과 손을 잡고, 소련은 공화국의 진보적인 아랍국(이집트, 시리아, 이라크)과 손을 잡으면서 중동 외교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것이다. 이로써 어느 쪽에도 가입하지 않고 제 3세계를 표방하던 중동도 미소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인 냉전체제에 급속히 편입된다.

류모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