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탈무드의 지혜교육, 그 원천을 찾아서…

탈무드의 요람,예쉬바의 자취를 따라서

쉬바(yeshiva)는 기본적으로 탈무드의 교육기관(Talmudic Learning Institute)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게 되는 예쉬바를 통한 탈무드 학습의 독특한 교육 방식은 예쉬바의 험난한 역사를 극복하고 지켜온 독특한 교육 과정, 그리고 철학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오늘날 정통 유대인들의 지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예쉬바의 교육과정은 일반 교육학 및 교육 철학적 차원의 관점에서 완전하게 서양 교육 시스템과는 차별된다.

특히 그 독특한 교육 방법론과 철학은 대부분 18 세기 이후 리투아니안 예쉬바(Lithuanian yeshivas)에서 크게 발전되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정통 유대인들 중에서도 극정통주의(Ultra-Orthodox)에 속하는 하레디(Haredi) 그룹의 예쉬바를 일반적으로 리투아니안 예쉬바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점에서, 리투아니안 예쉬바에 관한역사를 탐구하는 것은 예쉬바의 구체적인 발전 과정과 특히 그 교과 과정들에 대한 핵심적인 특성들을 찾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만약 탈무드 교육과 유대교의 신학적, 철학적 사상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우선적으로 그 탈무드의 요람인 예쉬바에 대한 기본적인 역사적, 철학적인 배경에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앞으로 몇 호에걸쳐 기본적으로 디아스포라의 예쉬바를 중심으로 그 역사적인 순서에 따라 리투아니아 예쉬바의 커리큘럼에 대한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예쉬바의 중요한 변화의 과정들과 일련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다면, 흥미로운 예쉬바의 역사적인 자취들을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유대인 교육 기관은 지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다양하고도 큰 변화를 경험했다. 특히, 러시아와 유럽을 중심으로 세워진 예쉬바들이 수많은 핍박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유대교 신앙을 지켜 그 명맥을오늘날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예쉬바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예쉬바의 역사의 중심에 바로 리투아니안 예쉬바의 교육 시스템이 보석과 같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사실 오늘날 현대 유대인들에게 조차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교육 시스템에 대한 충분한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나아가, 그 독특한 교육적, 철학적인 방법론을 살펴보는 것은 진정한 혁신을 요구하는 현대 교육 시스템들의 발전에 중요한 통찰력과 방향을 줄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그럼, 지금부터 탈무드의 지혜가 살아 숨쉬는 예쉬바의 역사의 현장으로 함께 들어가 보도록 하자.

“예쉬바”) 만 몇가지 가능한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실제 탈무드를 배우는 교육 기관인 탈무드 학교(오늘날의 예쉬바)에는 좌석의 고정 순서가 있었고, 또한, 토론 때에는 학생들과마주 앉아서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유대인의 기본적인 문화에서 대화와 토론을 할 때 앉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특별히 앉는 행위는 자신을 가르치는 스승 앞에서 배움을 준비하는 제자로서 깊은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앉는다”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공부하는 행위에 있어서 가장중요한 행동 중 하나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 교육 기관의 이름을 ‘예쉬바’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예쉬바에 대한 몇 가지 동의어가있다. 베트 미드라쉬(bet ha-midrash)는 문자적으로 공부의 집(the house of study), 베트 딘(bet din)은 법의 집(thehouse oflaw), 그리고 예쉬바의 아람어 번역인 미티브타(mitivta)가 있다. 이러한 호칭들은 ‘예쉬바’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불려지기 전에 존재했던 예쉬바의 전형이라고볼 수 있다.

사실 아가다(Aggadah)에 따르면, 이미 예쉬바는 요셉 이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미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기도 하다. 이후 타나임(Tannaim) 시대, 즉 제2차성전 시대 때, 예쉬바는 본격적으로 종교적이고 교육적인 기관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나아가, 예쉬바는 산헤드린(Sanhedrin)의 중앙 기관과 함께 그 기능, 절차 및 종교적 차원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제2차 성전 시대에 예쉬바에 관한 정보는 랍비 문학에 있어서 부족한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2차 성전 시대의가장 위대한 현자로 일컬어지는 랍비 힐렐(Hillel, 110 BCE-10 CE)이 을 통해 이미 예쉬바가 당시 왕성한 활동을 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아가다 전통에서 힐렐과 및 샴마이(Shammai) 학파 사이의 논쟁들을 통해 당시 예쉬바의 상황을 매우 분명하게 추측해 볼 수 있다.

한 가지 중요한 예로, 힐렐과 샴마이 학파 사이의 두 현자의 토론에서 가장 큰 핵심적인 이슈가 된 내용이 예쉬바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학생들에 대한 수용의 문제였다. 또한,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내용은 가장 유대교 전통에서 핵심이 되는 할라카(halakhah)가 바로 예쉬바에서 민주적인 다수결의 투표와 긴 심의와 토론을 통해 결정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에 예쉬바의 교육기관에서 오늘날 유대교의 핵심적인 할라카 전통이 제정되는 법적, 행정적인 역할을 하는, 매우 역사적, 법적, 종교적인 큰의미를 지닌 필수적인 기관이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제2차 성전 파괴 이후 많은 예쉬바들이 세워졌는데, 그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 Zakkai,30-90 CE)가 예루살렘 외부에서의 예쉬바를설립한 예라 할 수 있다. 제2차 성전파괴 이후의 예쉬바가 유대인의 역사와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유대교의 존폐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핵심적인 기관으로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특히, 당시예루살렘의 최고의 현자 중 하나였던 요하난 벤 자카이가 제2차 성전 파괴 이후 야브네(Jabneh)에서 할라카 전통을 총괄적으로 수집하고 편집하기 시작했다.특히 그를 중심으로 한 예쉬바의 현자들이 실제로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효과를 주기 위한 할라카 전통을 정립하려는 노력을 했음을 볼 수 있다. 타나임 시대와 동일하게 예쉬바에서 세부적인 토세프타(Tosefta)의 세부적인 내용들을 함께 토론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이러한 탈무드와 특히 할라카 전통의 명맥은 3세기에서 5세기의 아모라임(Amoraim) 시대로 전승되었다. 아모라임시대에는 로쉬 예쉬바(rosh yeshiva)라는직위가 있었는데, 이는 에레츠 이스라엘과바벨론의 탈무드 학교에서 가장 뛰어난 아카데미의 현자로 임명했다. 한편, 바벨론의 네하르데아(Nehardea)와 수라(Sura)의 예쉬바는 라브(Rav)라 불리는 사무엘과 같은 저명한 리더들에 의해 운영되기도했다. 네하르데아의 예쉬바는 파괴된 이후에 품베디타(Pumbedita)에서 재건되었다.

당시 에레츠 이스라엘과 바벨론에서 예쉬바의 궁극적인 목적은 새로운 지역과 상황에 따라 할라카 전통을 유지하고 발전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할라카 학자의 양성에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왜 요하난벤 자카이가 예루살렘 사수를 포기하면서까지 야브네에 예쉬바를 세우려고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요하난 벤 자카이가 잔혹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유대인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예루살렘 사수가 아닌, 전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이 예쉬바라는 교육기관을 통한 탈무드 학문 연구와 유대인의 실천적인 할라카 전통의 유지로서 가능할 것이라는 장래의 일들을 깊은 혜안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정문 목사
고신신대원 졸업 히브리대학교 교육학 석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