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USALEM COLUMN
이스라엘투데이

이슬람 1500년 역사를 따라서…1차 중동전쟁(2)

아랍 연합군은 군대와 화기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도 불가사의한 패배를 맛보았다. 그것도 두 번의 휴전을 거친 삼세번의 전쟁에서 모두 패배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이들이 패배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준비부족이다. 특히 이집트의 경우 준비되지 않은 전쟁 참여가 모욕적인 패배만을 안겨줄 뿐임을 보여주는 좋은 케이스가 된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의 지도조차 카이로 시내 상인에게서 간신히 사야 했고 참전 뒤에도 시내 반도에서 팔레스타인 진입로인 가자(Gaza)까지 병력을 실어 나를 수단이 없어서 팔레스타인 트럭을 빌려야 했다. 이집트의 참전은 내각이나 군사 전문가의 결정이 아니라 순전히 국왕인 파루크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참전 목적도 이스라엘을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최대 라이벌인 요르단 국왕 압둘라가 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지구를 점유하는 것을 막는데 있었다.

게다가 파루크의 정부(情婦)인 리리안네코헨(영화배우 카멜리아)을 통해 이집트의 내부 상황은 이스라엘 스파이에게 속속 전달되었다.

둘째, 지휘권 부재와 상호불신이다. 전쟁 시작과 함께 아랍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요르단 국왕인 압둘라가 선출되었다. 아랍 최정예군인 요르단의 진군으로 초기 판세는 압도적으로 아랍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요르단 군이 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지구를 점령한 후 주춤하자 다른 아랍국들은 압둘라를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압둘라 국왕이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 전부터 영국 위임통치 정부와 유대인 시온주의 단체와 비밀협상을 벌이며 서안지구에 눈독을 들여온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던터였다.

서안지구에 포함된 예루살렘은 아라비아에 있는 메카, 메디나에 이어 이슬람 3대 성지인 황금돔 사원이 있기 때문에 모든 아랍국들이 탐내는 지역이었다. 특히 아랍권의맹주 자리를 놓고 막후에서 경쟁하던 이집트와 요르단의 상황을 알 때 압둘라의 이런 행동은 다른 아랍국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결국 이번 전쟁을 압둘라 국왕의목적을 이루어주기 위해 자신들이 ‘들러리’로 나서는 전쟁으로 여긴 것이다.

이런 상황은 곧 지휘권 부재와 상호불신으로 나타났다. 아랍 연합군은 협동작전은커녕 서로를 적으로 오인해 공격하기도 했다. 전쟁 수행 중 곳곳에서 난맥상이 초래되고 상호간에 이해관계가 상충됨으로 인해 행동통일에 심각한 균열이 나타났다. 결국 전쟁의 1차 목표인 ‘이스라엘 타도’는 ‘요르단 견제’로 바뀌어 전투에 참여한아랍군들을 심각한 혼란에 빠뜨렸다.

셋째, 변화된 국제정세의 흐름을 읽는 감각의 부족이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국제 외교무대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지고 미국과 소련이 부상했다. 하지만 아랍 연합군은 이런 흐름을 읽지 못했고 미국과 소련이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나설 것을알지 못했다. 한 달간 지속된 처절한 전투가 폴케 공의 주선으로 1차 휴전에 들어가자 양측은유럽 무기시장에서 경쟁적으로 무기를 구입했다. 미국과 소련의 도움, 그리고 국제시장에 쫙 깔린 유대 상인들 덕분에 이스라엘 측은 체코를 통해 우수한 소련제 신무기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전투가 재개되자 팽팽하던 1차전과 달리 모든 전선에서 이스라엘 군의 우세가 드러났다.

2차 휴전을 끝내고 최종 3차전에 진입하자 전장(戰場)은 이미 팔레스타인을 넘어 이스라엘 전투기는 요르단 수도 암만과 이집트 수도 카이로를 공습했다. 이스라엘 군대가 수에즈 운하까지 진격하자 이집트의 반영주의자들이 그렇게도 굴욕적인 조약이라고 비난했던 1936년 ‘이집트-영국 협정’에 의거해 영국이 개입하고 나섰다. 결국영국과 맺은 굴욕적인 조약으로 인해 이집트는 자칫 수도 카이로가 함락될 수도 있는 더 굴욕적인 상황을 모면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이스라엘은 1947년 유엔이 그어준 국경보다 훨씬 더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집트와 요르단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던 상황이 벌어졌다.

이집트는 전투에 참전한 장교들을 중심으로 무능하고 부패한 왕정체제에 대한 불신이 폭발했다. 전쟁은 이집트 군이 빈 껍데기에 불과함을 만천하에 드러낸 수치와모욕그 자체였다. 왕의 측근들이 결함투성이의 무기를 고가에 구입한 것을 확인한 참전 군인들은 이후 체제 전복을 위한 용사로 탈바꿈하게 된다. 결국 1952년 쿠데타를 일으키고 파루크 국왕을 강제 퇴위시켜 국외로 추방해 버린다.

요르단의 상황은 이집트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이스라엘과 1949년 4월 3일, 느지막이 휴전 협상을 맺은 압둘라 국왕은 휴전의 조건으로 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지구를 넘겨받았다. 결국 압둘라가 전쟁에 참여한 최종 목적이 서안지구 점령에 있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1950년 압둘라 국왕은 서안지구를 자국영토로 합병하고 국호를 ‘트랜스 요르단’에서 ‘요르단’으로 변경한다.

이런 행위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눈에 철저한 배신 행위로 비쳐졌다. 1951년 7월 압둘라 국왕은 손자와 함께 예루살렘의 황금돔 사원을 방문했고 성난 팔레스타인 아랍인에 의해 저격되어 사망한다.

다행히 함께 있던 손자 후세인은 무사했다. 압둘라 국왕의 암살로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지만 정신이상으로 이듬해 폐위되고, 할아버지의 최후를 옆에서 목격한 미성년의손자 후세인이 1952년 국왕으로 즉위한다.

류모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