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LAM
이스라엘투데이

이집트의 세력 교체

유대인이지만 이집트에서 태어나서 20살 때까지 자란 라헬과 결혼한 것은 이집트의 정신을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민주적으로 당선된 모하메드 모르시 대통령을 끌어내린 변혁 이후 이집트의 미래를 분석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어떻게 모르시의 모슬렘 형제단이 처음에 권력을 잡게 되었던가? 그것은 ‘무료 식당 급식’을 통해서였다. 하마스가 가자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몰아낸 것과,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간 총리의 이슬람 정당이 터키에서 세속주의 케말리스트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도 가난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표를 사는’ 유사한 전략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르시가 1년 안에 권좌에서 축출된 이유가 무엇일까? 간단하다. 모르시는 모슬렘 칼리프 통치를 원했고, 반-서방세계, 반-기독교적인 엄격한 샤리아 법을 부과하려 했다. 이로 인해 관광객들과 투자가들이 이집트에서 등을 돌렸다. 극단적인 이슬람 규정은 경제를 성장시키는 외국인 투자들에게 비우호적인 것이었다.

이집트는 20세기 초반에는 안정적이고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집트와 이슬람 세계에 걸쳐 살고 있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책의 백성들’, 아랍어로는 아헬 알-키타브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한 백성으로 간주된다. 이슬람 세계의 눈에 오직 다른 점은 유대인들은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키고, 기독교인들은 주일을 지키는 것뿐이다. 그래서 모슬렘의 슬로건이 “토요일에는 유대인을, 일요일에는 기독교인을 죽일 것이다”였다.

내 아내가 1967년 이집트에서 추방되었을 때, 그녀의 기독교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울었다: “네가 이집트를 떠나게 되어 무척 슬퍼. 너는 이집트에서 얼마 남지 않은 유대인이었어. 토요일의 민족 유대인들이 떠나면 모슬렘들은 일요일의 사람들인 우리 기독교인들을 쫓아 올 거야.”

유대인들은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세 번에 걸친 갈등을 빚자 이집트를 떠났다. 세 번의 갈등은 1948년 독립 전쟁, 1956년 시나이 캠페인, 1967년 6일 전쟁이다. 1952년 군사 구데타로 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이집트의 대통령이 되고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대부분의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사람들을 추방 당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유일한 비-모슬렘 콥트 기독교인들도 떠나고 있다. 이집트 산업 공동체의 중추 역할을 했던 유대인들과 서방인들이 떠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격리와 핍박이 일어나자 이집트의 경제는 급속하게 추락했다.

관광업은 가장 큰 외화 수입원이었지만, 호스니 무바락 대통령이 2011년 몰락하면서 이것마저도 무너져 버렸다. 정치적 불안과 안전 부족으로 관광객들은 감소했다. 이후 2012년에 모르시가 당선되면서 경제는 더욱 타격을 입었다. 극단적인 이슬람 정부가 서방 세계의 관광객들을 두렵게 했기 때문이다.

군부는 모르시가 이 나라를 파괴시키고 모슬렘 형제단이 권력을 잡은 후, 시민들은 더욱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군대는 수 백만 이집트인들이 거리로 나와 이슬람 통치의 종결을 주장했을 때 국민의 편을 들었다.

이집트는 현재 기로에 서있다. 이러한 변화는 서방 세계를 다시 지지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모슬렘 형제단의 세력 만회와 더 깊은 혼돈을 가져올 것인가?

성경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창12:3)라고 말한다.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를 유지하고, 콥트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Picture - 국민에게 힘을: 모르시는 거리로 나온 1700만명의 이집트인들에 의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