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이스라엘투데이

철수, 전쟁 그리고 재 교전

2005년 부터…

이스라엘은2005년 8월 가자 지구에 있던 21개의 유대인 정착촌들을 ‘철거’시켰고, 이는 당시 아리엘 샤론 총리 지도 하의 여당 리쿠드 내부에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가져왔다. 우익인 여당이 철수 결정을 내리면서 시온주의 원칙에 반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샤론은 카디마 (앞으로)라는 새로운 중도 정당을 창당함으로써 리쿠드 당의 반란에 대응했다.

2005년 12월 샤론은 가벼운 뇌졸증 증세를 겪는다. 2006년 1월 그는 두 번째 증세를 겪었는데, 다량의 뇌출혈 후 지금까지 혼수 상태에 있다. 에후드 올메르트가 총리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리쿠드 당의 핵심 당원이자 예루살렘 시장이었던 올메르트는 카디마 당에서 샤론의 뒤를 이었다. 그는 3월 선거에서 카디마 당을 이끌었고, 리쿠드의 베냐민 네탄야후를 패배시키고 승리해 이스라엘의 제17대 정부를 구성했다.

올메르트의 연합 정부는 2006년 6월 25일에 첫 번째 중대한 도전을 맞게 되었다. 하마스 테러범들이 가자 지역에 있는 군부대 안으로 터널을 파서 길라드 샬릿을 납치하고, 다른 두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을 살해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에 군사 공격으로 대응했다.

2주 후 레바논에 있는 헤즈볼라가 국경 지대를 습격하여 세 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을 죽이고 두 명을 납치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이스라엘의 지상군과 공군이 동원된 34일간의 제 2차 레바논 전쟁이 발발했다. 헤즈볼라는 북쪽 이스라엘 국경 너머로 수 천 발의 로켓을 쏘며 대응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마비되었고, 경제적으로도 53억 5천만 달러의 손실을 가져 왔다. 무차별적으로 쏘아 올려진 로켓들은 이스라엘의 아랍 마을에도 떨어졌고, 많은 주민들은 남부로 피신했다.

이 전쟁으로 150명의 이스라엘 군인과 시민이 사망했다; 레바논에서는 헤즈볼라 테러범과 레바논 시민 등 1,200명이 생명을 잃었다.

8월 14일 유엔의 1701 결의안이 휴전을 이끌어냈다. 가열된 논쟁 가운데 정부와 군대의 전쟁 임무수행을 평가할 위노그라드 위원회가 임명되었다. 이 위원회는 최종 보고서에서 정치 및, 군대 지도부가 무능력해 장기간의 유혈 전쟁이 승리없이 종결되었다고 보고했다. 이로 인해 군 참모 총장 단 할루츠가 사임을 했다;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도 이 보고서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거부했다.

제 2차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이 확실하게 이기지 못한 최초의 전쟁이 되었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 군은 명성과 사기에 큰 타격을 입었다. 새로운 참모 총장 가브리엘 아쉬케나지의 지도력 아래서 이스라엘 군대는 다시 보강되었다.

정치 전선에서는 올메르트가 팔레스타인의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에게 유대와 사마리아의 94%를 포함하는 국가를 보장해 주고 동 예루살렘의 주권을 공유하는 것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협상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화 협상은 2008년 9월 올메르트가 부패 혐의로 사임하면서 중단 되었다. 2009년 2월 조기 총선이 실시되었고, 네탄야후는 카디마 당수인 찌피 리브니를 이기고, 새 정부를 구성했다.

선거 직전, 2008년 12월과 2009년 1월에 이스라엘은 국경 지역의 로켓 공격을 중단시키기 위해 가자에 있는 하마스에 3주에 걸친 공습과 지상군 공격을 감행했다.

2009년 6월, 강경파 네탄야후는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정책을 변경했다: 역사적인 연설을 통해 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종결 시키기 위해서 ‘두-나라 해법’을 요구했다. 하지만, 성경의 중심 무대인 유대와 사마리아에 있는 유대 정착촌 건설을 10개월 동안 동결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평화 협상은 4년 동안 교착 상태에 있었다. 교착 상태에 빠진 평화 협상은 2013년 7월 미국 국무 장관 존 케리가 중재자로 협상을 재기하면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Picture - 최후의 저항: 정착민들이 2005년 가자 철수에 항거하고 있다